박헌영의 게릴라 전쟁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복하지 않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안재홍 등과 함께 박헌영도 수년간의 복역과 회유에도 전향하지 않은 극소수의 ‘항일 공산운동가’중의 한명이었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해방 당시 한반도 최고의 좌파 정치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바로 박헌영이었지만,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의 치명적 한계인 국제공산당주의와 소련에 대한 맹종은 그를 민족을 배신한 전범이요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몰락으로 몰아갔다.
해방 초기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소련의 지령에 따라 하루 아침에 찬탁에 나섬으로서, 남한 민중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좌파의 남한 헤게모니를 상실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연달아 정판사 사건, 소위 신전술에 의한 10월 폭동 등을 일으켜 북한으로 탈출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규모 파업, 잔인한 폭동, 여순 반란사건에는 북한의 소련군정이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
[스티코프 일기 1948년 9월 6일]
최고인민회의 회의가 지속되다.
헌법에 의해 김두봉이 보고하다. 김두봉의 보고에 대한 토론과 발언이 전개되다.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다음 사항에 대해 설명하다.
1. 남조선 군대의 장악에 대해, 방법과 실천 방안
2. 경찰의 장악에 대해
3. 탄약 공장에 대해
4. 인민들에게 소련 정부의 결정을 해설하는 문제에 대해
5. 조선인민군 부대의 추가적인 편성에 대해
6. 군대에서 지휘관과 정치활동가의 선발에 대해
7. 남북조선에서 공장들과 농촌에서 무장혁명부대를 창설하는 문제에 대해
8. 경찰의 무장훈련을 강화하다.[1]
그리고, 반민특위가 진행되던 시기에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져, 이승만정권의 조작이라는 의혹이 많았지만, 당시의 북한대사였던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남로당의 프락치공작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위원들은 국회 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 등이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실행된 예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법률안 심의 시 이들은 법률안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49년 9월 15일)’[2]
‘박헌영 학교’라고 불리우던 황해도 해주의 강동정치학원도 이그차치프 대좌의 제안과 스탈린의 재가에 의해 48년 1월1일 소련 교포 박병률을 원장으로하여 개원하였는데, 사실상의 실권자는 박헌영의 사람인 부원장 박치우였다.
맨몸으로 월북한 남로당원들에게 이곳은 여관의 역할까지 담당하였고, 박헌영은 이승엽과 비서인 조두원 등과 매주 한번 이곳을 방문하였다.
문제는 이 학원에서 50년 6.25전까지 4천여명의 무장유격대를 남파했다는데 있다. 북한정권이 정치적으로 남로당원들을 부담스러워했고, 박헌영의 정치적 야망의 희생자로 그 시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이들이 무모한 무장투쟁에 내몰림으로로써 남한의 강력한 토벌작전에 대부분 사살되고마는 비극을 당했다.[3]
49년 8월에 안동지구에 침투한 3백명의 김달삼부대와 9월에 태백산으로 진출한 3백 60명의 이호제부대는 동계 토벌작전과 귀순 등으로 50년 3월에는 겨우 60명만 살아남았다.
8월말: 김달삼 , 나훈, 성동구 등 3백여명이 의성경찰서 및 무기고, 의성우편국, 금융조합 등에 방화하고 경관 6명 살해, 트럭 2대 약탈’
10월 중순: 안동읍 옥동국민학교 주둔 국군 3사단 22연대 습격
11월 초순: 9월 태백산에 침투한 제1병단(이호제부대)과 제3병단(김달삼부대)이 합류하여 3개대대로 편성하고 11월 8일에는 일월산에서 경찰과 교전, 경관 수십명 살해
11월 25일: 안동의 화악산에서 국군 25연대와 접전, 장병 7명 살해, M1 7정과 군모 등을 약탈. 또한 이 무렵 일월산에서 경찰과 교전 11명 살해
50년 1월 21일: 1병단 1대대(대대장 남도부)는 영덕군 영해지서를, 제2대대(대대장 나상일)은 창수지서를 각각 동시에 습격하여 경관 28명 살해. 면사무소, 금융조합 기타 민가 3백여호를 불태우고 양곡창고를 방화하여 곡물 약 7천 가마를 불태웠다. 금융조합의 금고에서 현금 한 배낭을 강탈, 그밖에 99식 소총, 수정과 식량 70가마, 옷가지 등을 약탈했다.[4]
49년 6월 부터는 사상전향을 위한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약 30만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 남로당은 남한내의 세력을 사실상 대부분 잃게 된다. 이러한 여파로 6.25남침에서 공산당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중국처럼 공산당원이 국민군에 침투하여 후방교란, 반란, 투항 등이 발생하지 않음으로써 단결된 투쟁으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박헌영은 53년 3월 11일 공화국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행위 등의 혐의로 이강국, 이승엽 등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7월 19일 57세의 나이에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의 혐의로 평양 근교의 야산에서 권총으로 살해당했다.
한편, 월북한 남로당원들은 지리산의 이현상부대를 불러들여 평양을 공격하려 한다는 혐의로 수천명이 체포되어 있었으며, 이현상은 박헌영이 몰락한 사실을 알고 있어 월북을 포기하고 수백명의 잔존 유격대원들과 지리산에 머물다가 산중에서 그의 아이를 가진 하수복을 만나려고 진주를 향하던 중 53년 9월 18일 사살되었다.[5]
[1]전현수, <쉬띄꼬프일기1946~1948>, 172~173쪽
[2]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2015, 674쪽
[3]안재성, <박헌영 평전>, 2020, 455~457쪽
[4]김남식, <남로당연구>, 421~422쪽
[5]안재성, 위의 책, 651~6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