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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면 자학적이라고?’황현필비판6편

정통사관 완전정복

by 현진석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면 자학적이라고?> 황현필 反韓史觀 비판 6편


5.18이후 북조선에서 대남공작을 통해 널리 퍼트린, 대한민국의 역사를 무한정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자학사관’이다!

반한사관의 주장처럼 두명의 건국초기 대통령이 천하의 극악무도한 통치로 30년을 보냈는데, 어느날 갑자기 한국이 세계적 산업문화국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내러티브인가!


국민도 완벽하지 않았고 지도자도 완벽하지 않던 시대의 공과를 7:3으로 겸허하게 평가하며 ‘긍정과 통합’의 역사관으로 승화시키고, 임정의 법통를 넘어 민족의 법통을 자랑스럽게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통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 올바른 역사관일 것이다.


(황현필, 376쪽)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은 1960~1970년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개발과 시대흐름을 같이했다. 특히 냉전체제 경쟁에서 자유진영의 승리를 위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어느 국가와도 견줄 수 없다.

한국인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잘먹고 잘산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영리하고 학구열도 높다. 여기에 부정할 수 없는 천민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더해져, 남보다 잘살고 싶은 열망이 우리의 경제성장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난했을 것이라는 자학적이고 피동적인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정통사관, 123쪽) (미국에서 제철소차관을 거절당해) 절망한 박태준은 귀국길의 하와이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바로 대일 청구권 중에 농수산 용도로 남았었던 1억 달러를 전용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자신들의 산업경쟁력을 위험할 수 있는 한국의 제철사업에 과연 협조할 것인가 였는데,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에 박태준은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내 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문화를 잘알고 있어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박태준을 만난 일본 정재계의 거물들은 조국근대화에 대한 박태준의 애국심과 중후하고 빼어난 인품에 매료되어 어려운 문제들을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 양명학의 대가이며 정재계 거물이었던 야스오카 마사아쓰, 일본철강연맹의 이나야마 회장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 고비로 통산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면담한 박태준은 한국의 경제상황으로는 농업자립화가 우선이 되어야한다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세번째 만남에서 급하게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뒤진 정보를 쏟아냈다.(중략)


대응을 궁색하게 하는 역사적 사실과 북한의 안보위협까지 거론하자, 오히라의 작은 눈이 세번의 만남에서 드디어 실눈을 들어냈고 제철건설자금의 숨통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일본제철협상단과의 협상에서는 서독의 최신 기술을 견학한 김재관 박사의 활약이 눈부셨다.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은 세탁기, 밥솥 등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을 제안했으나, 김재관은 제선, 압연, 제강을 연속 주조하는 지상 100미터에 이르는 고로방식의 최첨단 일관제철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선박, 자동차생산이 가능한 후판과 강판을 만들 수 있는 포항종합제철의 건설을 완성하게 되었다.‘


(정통사관, 44쪽) ‘외세에 의한 독립과 냉전의 시작으로 국토분단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불굴의 독립혼을 불태웠던 임시정부 주도의 해외독립운동가들과 일제의 가혹한 강압에 비굴한 복종과 소극적 협력을 해야 했던 국내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소련의 강압적인 통치와 위성국가 건설에 항의하며 남한으로 내려온 수많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남로당 좌파의 격렬한 폭력투쟁과 외세를 끌어들인 진정한 민족반역자 김일성, 박헌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피 흘리며 지켜낸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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