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로보휠체어
바람이 불어와 미로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세 번째 칸에서 오른쪽 위라고 했는데 일어설 수가 없으니, 거기에 열쇠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뻗어 보아도 손이 닿지 않았다. 이럴 때 로보휠체어가 필요한 건데. 그것을 구하기가 병원에서 탈출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미로의 뒤 목덜미와 귀 옆에서 땀이 도르르 흘러내렸다. 다시 매디아크 병원에 이송된 이후로 이렇게 과격한 활동을 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종아리가 마비되어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미로는 일어서지 않고 위 칸의 상자를 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건을 넣어 두는 렉과 렉 사이에는 휠체어 하나가 조심해서 지나갈 만큼의 공간만 존재했다. 위의 상자를 쏟아 버리면 열쇠를 가져간 것이 들통날 것이 뻔했다. 아무래도 이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희노가 잠시 차트를 정리하는 사이 미로는 또 병실에서 사라졌다. 희노는 이제 미로가 사라지면 어디에 있는지 환히 꿰고 있었다. 미로가 시도 때도 없이 가서 구경하는 파란 기와지붕집. 정원의 동쪽 끝 담장 너머에 있는 그 집 앞에서 미로는 길 잃은 사람처럼 오랜 시간 머물렀다. 희노가 미로를 찾아 헤매다가 정원의 담장 옆에서 미로를 처음 발견했던 날, 미로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눈물은 여러 갈래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족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저런 모습으로 운다는 것을 희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울고 있지 않은데도 눈물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 듯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희노는 뒤로 물러서서 미로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눈물이 나게 하는 것처럼 눈물을 멈추게 하는 무언가 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건지 희노는 궁금했다.
정원 담장 옆 파란 기와지붕을 네 번이나 지나치며 샅샅이 뒤졌지만, 미로는 정원 어디에도 없었다. 미로처럼 희노를 애타게 하는 환자는 이제껏 없었다. 미로는 희노에게 아무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가끔 미로의 숨겨진 절망을 대할 때마다 희노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해야 할지, 도움을 청하지 않는 미로를 탓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할 뿐이었다. 희노는 31 병동 옆 기계실 옥상 문을 열었다. 거기에도 미로는 없었다. 여기 옥상은 미로가 가끔 들어와 혼잣말하는 곳이었다. 미로는 병실에서도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희노는 미로가 혼잣말할 때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순심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마다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병은 사람을 외롭게 하고 외로움이 정신을 좀먹을 때면 오히려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주는 편이 더 건강한 거라고. 희노는 미로가 건강한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여겼다. 기계실 옥상에도 미로는 없었다. 미로가 혼자 말하는 장소를 바꾼 것일 것일까? 넓은 병원을 다 뒤질 수는 없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 병실에 돌아와 있어야 했다. 조바심 난 희노의 발걸음이 다시 미로의 병실 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한참을 찾았어.”
희노의 격앙된 목소리에 미로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며 대꾸했다.
“그냥 정원에 있었어”
“정원을 4바퀴나 돌았어. 너 찾으려고. 어디에도 없던데.”
“내가 병실에 들어온 사이에 나간 모양이야. 어긋났네” 미로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 열 있어? “ 희노는 미로 가까이에 다가섰다.
“아니야 괜찮아 정원에 좀 오래 있었더니 피곤해서 그래.”
희노는 미로의 말투가 뭔가 의심스러웠다. 표정과 말투가 조화롭지 않았다.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땀을 흘렸다. 미로가 요즘 자신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희노는 안다. 그게 뭔지 몰라도 미로가 병원에 온 후 처음으로 활기에 찬 모습을 보이는 것이 희노는 도리어 기분이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의 곧 죽을 것 같았던 미로보다 요즘처럼 엉뚱한 미로가 희노는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희노에게 뭔가 들키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 간 곧 탈출 계획을 희노가 알아차릴 것만 같아 미로는 마음을 졸였다. 미로는 정 간호사가 불을 끄고 병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불속에서 나와 다시 휠체어에 앉아 *올(A.L.L)이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올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정령이었다. 말투로는 중학생쯤 된 것 같았다. 미로가 처음 병원에 와서 밤마다 울고 있을 때 올이 처음 말을 걸어왔다. 올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밤새도록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다. 미로는 금동 할머니 얘기를 하고 올은 올의 엄마 얘기를 했다. 미로는 올의 엄마가 올의 손을 끝까지 놓지 못해 장례식을 며칠 미루어야 했던 얘기부터 5살 때부터 병원에서 살았던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 올(A.L.L)/급성림프구성백혈병: 병원의 정령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이름을 잊고 앓았던 병명으로 자신을 기억한다.
죽음이란 단어가 마치 태어나 처음 배운 말인 듯이 미로에게는 너무나 친숙했었다. 곧 그에게 일어날 일,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 들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우주 먼 행성에서 온 생명체의 목소리 같았다. 미로는 자신이 느꼈던 죽음은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저 죽음을 단어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올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로는 실제로 자신 앞에 깔린 죽음의 카페트에 한 발짝 올라선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여름바람이 방향제 섞인 에탄올 냄새를 미로의 감은 눈 위로 끼얹었다. 미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난밤의 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로는 네모반듯한 하얀 병실의 천정이, 닫으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차광막까지 달린 창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십오 년을 살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미로는 반듯한 이 건물 안에서 구역질이 났다.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는 숨 막힘을 느꼈다. 친절하지만 타성에 젖은 의료진들의 목소리에는 어떤 애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미로는 업무의 연속일 뿐이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손을 잡고 울어 줄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절대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로는 자신의 몸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직 미성년자였고 태어난 곳에서 그녀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은 자신과 이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마치 독수리 앞에 앉아 있는 굶주린 아이처럼 모든 희망의 줄을 놓고 그냥 죽음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할머니의 유골이 있는 고성으로 돌아가서 미로와 닮은 그 집에서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날부터 미로는 병원을 탈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휠체어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미로에게 탈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보휠체어가 필요했다. 분명 병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로보휠체어만 찾으면 활동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탈출은 생각보다 용이할지도 몰랐다.
로보휠체어가 9층 로봇충전소에 있다는 건 올이 알려 주었다. 병원 물건을 보관하는 렉의 세 번째 칸 오른쪽 위에 로보휠체어의 전원버튼을 켜는 열쇠가 있다고 했다. 그곳은 저녁이면 희노가 충전하러 가는 곳이었다. 미로는 희노가 차트를 보는 사이 몰래 빠져나와 9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서는 열쇠를 꺼낼 수가 없었다. 미로는 탈출을 위해서는 희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인공 자의식을 가지도 있다고 해도 그에게 병원 매뉴얼이 지켜야 할 상위버전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전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