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아직 태양은 뜨지 않았지만, 창밖의 하늘은 붉은 생기를 뿜어내며 새벽의 어둠을 지우고 있을 시간. 미로의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희노는 한달음에 정원으로 내려가 파란 기와지붕이 보이는 담장 아래에서 미로의 휠체어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잘 잤어?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거야? 여름이라도 새벽바람은 차가워”
희노는 가지고 온 담요를 미로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저 집.., 허물고 있어.”
미로의 목소리는 담담함을 가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절망에 잠긴 채 떨렸다.
처음 담장 너머의 집을 발견했던 날, 한참을 들여다보던 미로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고성에 있을 때 살았던 집이랑 비슷해. 파란색 기와지붕이랑 오래된 나무 대문까지. 할머니 집 바로 앞에는 실개천이 흘렀어. 진우 랑 거기서 다리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곤 했어. 그 속에 오래된 잉어가 한 마리 살았거든. 무늬가 엄청 아름다웠지. 다리 건너면 조그만 언덕이 나와. 그 언덕과 연화천 사이에 200년 된 도토리나무가 있어. 그 나무에서 난 처음 정령을 봤어. 난 처음에 인형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줄 알고 진우한테 얘기했더니 진우는 안보인데. 솜사탕처럼 어스름한데 눈코입이 없는데도 알겠더라. 나를 보고 있다는 걸”
희노는 살며시 말끝에 끼어들었다.
“정령이 말도 걸어?”
미로가 놀란 듯이 희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응, 친구처럼 말을 걸어 주는 정령도 있고 마치 운동장 한가운데서 서서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교장 선생님 목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어.”
“지금 여기도 있어?”
“응 너 바로 옆에.”
“………뭐?”
희노가 놀라서 옆으로 한 발짝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고 미로는 큰소리로 웃었다. 희노는 웃고 있는 미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따라서 웃음소리를 내보았다.
허물어지는 집을 보고 돌아온 미로는 안색이 나빠졌다. 미로가 지금 얼마나 큰 고통을 참고 희노에게 웃음을 보이는지 희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미로가 웃어 보이는 표정으로 희노가 더 이상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정원의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본 미로는 탈출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집이 아니라 자신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열쇠가 없어진 것을 누군가 알더라도 이제 상관이 없었다. 로보휠체어를 타고 산책 때 발견한 정원 동쪽 담장 아래에 조그마한 쪽문을 통과해서 병원 밖으로 나갈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모르게 고성까지 가는 길을 검색하기 위해 방문객 안내 컴퓨터를 사용하러 1층으로 내려가던 미로는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희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다급하게 닫힘 버튼을 누르는 미로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병원에서 기차역까지는 도시를 가로질러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모르는 동네다. 기차를 이용하는 것은 단념해야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화물운송 버스 종착역이 있었다. 화물운송 버스에 올라타기만 하면 고성 고속 패키지룸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패키지룸에 내리면 거기서부터는 미로가 길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자원봉사 하시던 새로 지은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녁을 먹고 회진이 먼저 끝난 틈을 이용해서 9층으로 올라간 미로는 세 번째 칸의 상자를 아래로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상자가 떨어지면서 안에서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에 미로의 심장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열쇠를 손에 넣은 미로는 오늘 하루 아무도 로보휠체어를 찾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병실로 돌아왔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침대에 누운 미로는 갑자기 오한을 느껴 담요를 두르고는 올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
대부분의 환자들은 잠드는 것을 어려워한다. 아무리 진정제를 투여해도 병명의 무게만큼 고통은 그들의 일상을 병들게 했다. 31 병동, 고통 이외의 방문객이 금지된 밤 시간의 병동에서는 하루 건너 한 번씩은 숨죽인 울음소리와 침대 바퀴를 끄는 복도의 울림이 잠들지 못한 환자들의 맥박을 요동치게 했다. 각각의 방문 안에서 정해진 시간을 사는 환자들의 느린 한숨이 밤의 고통을 뚫고 새어 나왔다.
새벽에 헬퍼봇 전용충전기에 앉아 있다가 미로의 진료용 모니터에 보라색 줄이 깜박인 것을 보고 희노는 놀라서 미로병실로 뛰어갔다. 보라색은 환자의 위급 상태를 나타내는 레벨 중 두 번째로 심각한 색이었다.
미로는 의료진들에 둘러싸여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미로에게로 이어진 색색의 전선들이 미로의 생명을 모니터로 넘겨주는 동안 미로의 가는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미로의 상태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날 저녁, 미로가 눈을 떠서 처음 본 얼굴은 희노였다. 희노는 미로의 손에 낯익은 열쇠를 쥐여 주며 말했다.
“그 집이 오늘 다 허물어졌어, 가자. 네가 로보휠체어에 탈 수 있게 되면 그때.”
미로는 희노의 얼굴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 큰소리로 희노를 불렀다. 입 밖으로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는 목소리로 희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미로가 기력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미로는 그전보다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의 마비는 세상의 시간에 비례해서 오지 않았다. 희노는 일주일 내내 별말이 없이 미로의 곁에서 미로를 돌보았다. 희노가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없지만 미로는 느낄 수 있었다. 희노는 변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눈을 맞추고 이마를 짚고 식사를 나르고 창문을 열고, 그는 꼭 사람 같다고 미로는 생각했다. 매뉴얼대로 말하던 희노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
일주일 전 미로가 병실 안에서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을 희노는 문밖에서 들었다. 살짝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안에는 미로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미로는 자세한 병원 탈출 계획을 얘기하더니 갑자기 로보휠체어의 열쇠를 가지러 9층에 간다고 말했다. 그 열쇠가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지칭했다. 그 자리는 미로가 알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희노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야기를 밖에서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안돼, 희노를 이 계획에 끌어들일 순 없어.”
“ “
“아니, 로봇이라 서가 아니야. 희노는 표현을 못 할 뿐이지 감정은 다 느낄 수 있다고”
“ “
“넌 너의 엄마가 너를 잃었던 슬픔이 어땠을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보면 알아, 난 더 이상 아무도 나로 인해 고통받지 않길 원해. 희노는 일상이 죽음인 이곳에서 살아. 죽음이 뭔지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나아. 내가 희노를 끌어들이면 희노는 나의 죽음을 고스란히 안고 살겠지. 희노에게 분노센서를 켜게 하고 싶지 않아. 하하하”
“ “
“맞아 희노는 분노센서를 켜.. 저번에 희노가…..하하하”
희노는 미로가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를 듣고는 병실 문밖에 서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분노센서의 불이 켜졌다. 어두운 병원 복도 끝까지 희노의 가슴에서 시작된 주황색 불빛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