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과 먹는 것의 차이
어렸을 적 할머니댁은 전라남도 장흥군 이었다. 표고버섯과 소고기과 관자를 구워먹는 삼합이 유명한 곳. 그리고 그 옆에 녹차의 도시 보성이 있었다. 추석때면 어김없이 녹차밭을 갔다. 생각해보면 추석때인데 녹차밭은 푸르렀고, 관광객들로 넘처났다. 어렸을 때는 그 곳에 가는게 너무 싫었다. 계단식 밭이라고는 하지만 내 눈엔 그냥 풀이었고, 태양은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다. 녹차에게 필요한 햇볕이 나에게는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 때 찍힌 어릴적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죄다 "나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어요." 를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하나 내가 즐거운 시간이 있었는데, 녹차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였다. 녹차가 아니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였다. 녹차는 어른들의 음료다. 나는 그런 가부좌를 틀고 마셔야 할 것만 같은 고지식한 녹차는 싫었다. 나는 뛰어다니면서, 걸어다니면서, 누워서, 일회용 컵에 들고다니면서 가볍게 먹는, 입에서 사르르 녹으며 녹차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이 적절히 섞인 아이스크림이 좋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았다. 녹차는 싫고, 녹차맛 아이스크림은 좋다? 이게 뭘까.
녹차는 싫고, 녹차맛 아이스크림은 좋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다. 그 굳어있는 모습이, 내 입속에 들어오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니까. 인간은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눈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눈을 먹어보겠다고 입을 벌리고, 그 입에 들어온 눈을 재연한 것이 아이스크림이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음식은 거의 드물다.
그런 아이스크림을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분해를 해보자면, 휘핑을 칠 때 공기가 액체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액체의 여려 성분들이 (지방 단백질과 같은 것들이) 기포가 꺼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여기에 얼려주기까지하면 그 기포는 얼어버린 액체속에 갇혀버린다. 그래서 지방과 액체의 함량이 어느정도냐에 따라 그 안에 갇히는 공기의 정도가 정해지고, 이것이 우리 입에 그 부드러운, '눈 녹듯 사라지는' 식감을 연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
쉽게 생각해서 물만 거품치는 것과 우유만 거품치는 것과 생크림만 거품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걸 얼렸을 때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속에서는 액체 100% 보다는 공기반 액체반인 제품이 우리에게 더 재미있게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통해 오미를 담당하는 '맛' 의 영역보다 '식감' 의 영역이 중요함을 이야기해본다.
베스킨라빈스에 사랑에 빠진 딸기를 그려보자. 머릿속에
허여멀건한 빨간색에 딸기가 종종 박혀있다. 그리고 뉴욕치즈케이크에 그 치즈가 박혀있으며 초콜렛이 박혀있다. 나는 이 아이스크림이 베스킨라빈스에서 가장좋더라.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맛은 딸기맛, 초코맛, 치즈맛 정도이다. 그러면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자.
아빠숟가락에 치즈케이크 한 입 푸고, 딸기와 초콜렛을 올려놓는다고 일명 '사빠딸' 의 맛이 날까? NOPE
그렇다면 이번에는 비슷한 놈끼리 비교해보자. 얼음위주의 콜드스프링 딸기맛과 크림위주의 요맘때 딸기맛은 같은 맛이 날까? NOPE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렇게도 비교해보자. 딸기를 그대로 얼린 것과 딸기슬러쉬는 맛이 같을까? NOPE
눈에보이는 딸기와 색은 같을지라도, 그 안에 눈에보이지 않는 공기의 양에 따라서 우리는 전혀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맛을 조절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식감을 조절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공기를 만지고 식감을 먹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맛있다고 느껴지는거는 맛이 아니라 그 맛을 혀에서 갖고노는 '식감' 이라는 요소였던 것 같다.
감자의 수분기를 빼고 바삭하게 만든게 감자칩이요,
딸기의 수분을 없애고 만드는 것이 딸기잼이요,
크림에 공기를 주입해 부드러움을 더한것이 아이스크림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특정학과' 를 간다고 재밌는게 아니다. '특정 회사' 를 들어가서 재밌는게 아니다. 그 회사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 '식감' 이 중요했던 것이다.
'식감' 은 그 물질의 맛은 그대로나 질감이 달라지는 것이니 학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게 아이스크림과 같이 신비로움을 준다면 진부해보이는 철학과라도 재밌는 것이며,(저는 철학과 좋아합니다만...) 회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대기업 고액연봉에 화려한 복지가 있어도 나에게 그저 물 얼음과 같다면 머리 깨질정도로 차갑고 딱딱할 뿐일 것이다.
식감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요리사에게 중요하다. 원물 그대로 주는 것이 농부라면 식감을 만지는 것이 요리사다.
우리는 삶에서 공기를 만지고 식감을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맛있어지도록 말이다.
당신은 어느 영역에서 어떤 공기를 만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