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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르는 이름

by 윤재


지금은 여름입니다.

갈수록 점점 더 유난히 여름이 길고 뜨겁습니다.

햇볕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바람조차 숨을 멈춘 듯합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고, 열기로 가득 찬 거리는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짐승처럼 숨을 몰아쉽니다.

이 여름의 한가운데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읽고 있습니다.

9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떨어진 별” 편에는,

“밤이 되자 바람 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이광민은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광막한 설원을 휩쓸고 있는 그 바람 소리는 한없이 외롭고 슬프게 느껴졌다.

그 바람 소리는 무슨 외로운 절규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슬픈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잠은 오지 않고, 바람 소리 저편에 있는 그 여자가 자꾸만 생각났다. 이제는 남의 사람이 된 여자 윤선숙. 왜 그리 간절하게 보고 싶어지는 것인가. 남의 사람이 되어서 더 그런가. 가까이 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집주인의 말로는 우수리스크까지 200리 정도라고 했다. 마차를 타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칼바람 부는 눈보라 속에서도 윤선숙을 한 번만 만나보고 싶었다.“(p. 330-331)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날 지삼출과 이광민은 얼어붙은 아무르강을 썰매 마차로 건넜다. 2월이 저물고 있었지만 광막한 벌판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 막막한 눈벌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지고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알 수가 없고 그 눈 바다에 파묻히고 말 것만 같은 것이다. 마차는 눈이 없는 계절에 비해 절반밖에 달리지 못했다. 날도 춥고 길도 미끄러운 탓이었다. 그러나 그건 눈이 안 오는 날의 경우이고 눈이 내리면 마차는 아예 떠나지를 않았다. 한겨울에 만주나 연해주에서는 함박눈이라는 건 내리지 않았다.” (p. 332) 는 장면들을 읽으면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유리 지바고와 라라. 그들의 사랑 역시 역사와 운명 앞에서 침묵해야 했고, 만남보다 이별과 그리움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윤선숙과 라라.
그들은 모두, 시대의 격랑 속에 사랑을 묻어야 했던 여자들입니다.
남의 여자가 되었지만,
그녀들의 존재는 바람처럼, 기억처럼,
쉽게 흩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 이백 리.
그러나 진짜 거리는 마음이겠지요.
지바고는 시베리아의 끝에서 라라를 생각했고,
아리랑의 화자는 조선의 눈보라 속에서 윤선숙을 떠올렸습니다.



하얗게 얼어붙은 만주의 겨울.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날카로운 차가움에 찔리던 공기.

<아리랑> 속 겨울은 그런 풍경입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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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하얼빈> 중에서




지삼출과 이광민이 함께 아무르강을 건너던 날,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흰 눈에 덮여 있었고,
세상은 말이 없습니다.

"눈 바다에 파묻히고 말 것만 같은 것"이라는 표현처럼,
그곳은 방향도, 끝도, 사람도 사라지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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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는 단지 육체를 얼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과 감정까지 조용히 봉인하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 잊으려 했던 것들을 선명하게 떠올립니다.

이광민은 광막한 설원을 휩쓸고 있는 바람 소리 속에서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윤선숙을 떠올렸고,
그리움은 그의 발보다 먼저 들판을 건너고 있습니다.



추위는 때때로 감정을 더 또렷하게 만듭니다.
뜨거운 사랑은 여름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어붙은 계절 속에서 더욱 오래 지속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순간이야말로
사랑이 가장 깊이 스며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눈보라는, 러시아의 거대한 변화 혁명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과 사랑을 휩쓸고 지나가는 고난과 시련을 더욱 부각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시인이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소설 <닥터 지바고>는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얻게 되었지만, 당시 정부와 작가동맹의 압력으로 작가의 생전에는 받지 못하고 아들이 그의 사후에 대신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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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IMDb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는 문장들은 신영복 선생이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증발하고, 숨조차 막힐 듯한 여름의 뜨거움 속에서 문득 신영복 선생의 “여름의 감옥은 옆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 는 문장은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을 돌아보게 합니다.


존재란 그 자체로 타인과 함께임을 전제하는데, 혹여라도 여름이라는 감각적 무게가 이 ‘공존’을 깨뜨리고, 나를 고립된 섬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이 여름의 감옥 속에서 누군가의 체온을 미워하기보다는, 마음의 온도 먼저 살피고, 그 곁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숨 쉬게 해주는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야 바람이 부르는 이름을 들을 수 있겠지요.

그것이 ‘사람답게 산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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