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몇 시간 앞둔 시간, 사촌 시동생에게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유쾌하시고 긍정적이시며, 조카며느리들 중에 아마도 저를 제일 예뻐하셨던(제 생각에…) 시고모님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모두가 한 해의 ‘시작’을 준비하던 밤, 저는 한 사람의 ‘끝’을 먼저 마주했습니다.
새해 첫날, 새해맞이 일련의 의식을 마치고 오후에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설날이라서였을까요, 영정 속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는 고모님과 달리, 조문객이 많지 않은 장례식장은 유난히 서늘했습니다. 웃고 있는 얼굴과 식어 있는 공기 사이에서 저는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아들바라기’ 셨던 고모님.
그 아들과 스스럼없이 “사랑해”를 나누셨던 고모님.
고모님과의 일화를 전하던 시동생의 굵고 진한 눈물이 선하고 반듯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은 말보다 먼저 도착한 슬픔의 언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려 애썼지만, 사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받아들이느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늦은 밤 장례식장을 나서며 차가운 공기를 마셨을 때, 얼마 전 비행기 속에서 보았던 영화 <Elenor the Great>가 떠올랐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날 밤에서야 그 영화가 조금 더 가까이 와 있는 듯했습니다. 영화는 한 사람의 삶을 통과해 흐르는 상실의 그림자를 따라가면서도, 그 그림자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공감의 빛을 조심스럽게 길어 올리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사건보다 한 인물의 감정 곡선을 따라가는 섬세한 영화는, ‘상실 이후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애도의 시간이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주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90대 할머니이자 12년 지기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베시(리타 조하르)가 영화 초반에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재치 있고 솔직한 주인공 엘리노어(준 스퀴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코미디 드라마입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베시는 죽기 전,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중 엘리노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 속 엘리노어는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낸 뒤 적막한 공간을 홀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식탁 위의 빈자리,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물건들,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시간.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체조를 하던 모래사장 벤치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아 친구의 빈자리를 봅니다.
장례식장의 서늘한 공기와 엘리노어 그녀의 집 안에 흐르던 침묵은 묘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상실은 장소를 바꾸어도 같은 온도로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후 엘리노어는 소원해진 딸 리사(제시카 헥트)와 손자 맥스(윌 프라이스)와 함께 살게 됩니다. 리사는 엘리노어가 합창단에 나가 교류하길 원하다가 양로원에 들어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엘레노어가 뉴욕에서 살게 되며 벌어지는 전개는 선의의 거짓말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와 얼마 전에 엄마를 사고로 잃은 뉴욕대 저널리즘 학과 학생 니나(에린 켈리 먼)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아슬아슬한 흥미를 던집니다. 야곱이 에서에 대해 한 거짓말이 과연 좋은 일이었는지에 대해 랍비와 나누는 재미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사진출처: IMDb
상실은 단지 누군가의 부재가 아니라, 일상의 온도를 바꾸는 사건입니다. 무심코 꺼내 들었다가 멈춰버리는 전화기,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계절들. 영화는 이런 사소한 장면들을 통해 상실이 어떻게 기억의 틈을 파고들어 현재를 흔드는지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슬픔을 고립의 언어로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엘레노어는 닫힌 채로 남아 있을 것 같던 마음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열어 보입니다. 우정은 여기서 위로의 대체물이 아니라, 애도의 과정에 스며드는 또 하나의 감각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그 단순한 행위가 상처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해도, 견딜 수 있는 무게로 바꿉니다. 영화는 그 느린 변화를 과장 없이 따라갑니다.
영화에서
“슬픔은 사라지지 않아요. 다만 모양이 바뀔 뿐이죠.”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라는 대사는 공감은 조언이 아니라 ‘경청’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는 행위 자체가 이미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영화는 인상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 대사는 그날 밤 제 안에서 오래 맴돌았습니다. 시동생의 눈물과, 고모님을 추억하며 나누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고모님의 부재를 슬퍼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분의 존재를 다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농담을, 손맛을, “밥 먹었니?”라고 묻던 다정한 목소리를.
그 순간 슬픔은 고립이 아니라 연결이 되었습니다.
<Elenor the Great>는 애도를 ‘잊는 과정’이 아니라 ‘함께 기억하는 시간’으로 그려냅니다. 엘레노어는 상실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기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멈춰 세우는 벽이 아니라 타인과 이어지는 다리가 됩니다. 흔히 애도는 종종 ‘잊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이 영화는 애도를 ‘함께 기억하는 일’로 재정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화는 엘리노어의 고립을 강조하며, 상실의 어려움을 되짚어보는 대사들을 통해 이를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는 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인 슬픔을 어둠 속에 묻어버리는 걸까?
왜 우리는 인간적인 연결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걸까?”
장례식장을 나서던 그 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애도란 끝을 인정하는 의식이면서도,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새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겹쳐 있던 하루.
그날 밤, 영화는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제 삶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좀 더 다정한 한 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