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재종
--고재종(1959~ ), 「쪽빛 문장」, 문학사상, 2004
다음 주 대한을 지나면 곧 입춘입니다.
계절은 아직 겨울 한가운데 있습니다.
창밖의 공기는 차갑고, 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숨을 아끼며 서 있습니다. 가지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고재종의 「첫사랑」을 떠올립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 번 피우기 위해 눈이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겠느냐는 그 문장은, 지금의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봄은 늘 그렇게, 가장 추운 시간을 견딘 뒤에야 도착합니다.
고재종의 「첫사랑」은 그래서 따뜻합니다. 이 시는 사랑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간을 헛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눈이 녹고, 상처가 꽃이 되듯, 첫사랑은 우리를 조금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요.
「첫사랑」을 읽다 보면, 사랑은 어떤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에서 사랑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위에 피어나는 꽃, 멈추지 않고 두드리는 눈과 스쳐 가는 바람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그래서 이 시가 말하는 첫사랑은 분명 개인의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나 있었던 어떤 계절의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가지에 꽃 한 번 피우기 위해 눈이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겠느냐는 물음 앞에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첫사랑은 그렇게 서툴렀습니다. 다가가려다 미끄러지고, 마음을 내보였다가 다시 접기도 하고. “싸그락 싸그락”, “난분분 난분분”이라는 소리는 눈의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사랑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심장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아주 오래전, 젊은 시절의 첫사랑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그저 마음이 먼저 철이 들지 못한 탓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분간하기 어렵지만요. 다만 분명한 것은, 그때의 마음이 너무 가벼워서 바람 한 자락에도 흔들렸고, 시 속의 눈처럼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졌지요.
그러다 문득, 오래된 한 장면이 겹쳐 옵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였나 봅니다. 수업 중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지만, 마음 어딘가가 자꾸만 흔들리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시던 멋쟁이 교수님은 그런 나를 보시더니 웃으며 “이모셔널 한 것이면, 수업 참여 안 하고 밖으로 나가도 된다.”라고 하셨지요. 내 표정에 꽃물이 든 아련함을 알아보셨던 것일까요?
첫사랑은 결국 바람처럼 지나갔습니다.
붙잡을 틈도 없이, 손을 내밀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사랑.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봄이 오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고.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그 사랑이 남긴 것은 공허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온기였다는 것을.
한때는 아팠기에 기억되고,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순수하게 남을 수 있는.
「첫사랑」이 가장 깊이 와닿는 이유는, 사랑의 끝을 성취가 아닌 상처로 남겨 두기 때문입니다. 봄이 오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첫사랑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꽃이 됩니다. 그 상처는 아프지만, 한때 온 마음을 다 쏟았다는 증거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를 쉽게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고재종 시인의 시처럼, 그리고 그날 강의실 창가에서의 나처럼, 첫사랑은 늘 말없이 지나가지만 봄이 되면 다시 한번, 가장 조용하고도 선명한 꽃으로 마음속에 피어납니다.
지금 이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오래 전의 그 떨림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봄을 더 다정하게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봄이 오면, 마음속 가지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꽃 하나가 피어날 것임을.
*당분간 봄맞이 겨울방학에 들어갑니다. 기다려주시면 또 다른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