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난 내 곁의 그림

by 윤재


미술관의 문을 밀고 들어가 실제 작품 앞에 서는 일은 언제나 설레지만, 종종 책이라는 작은 창을 통해 먼저 그림을 만나기도 합니다.

손바닥만 한 지면 위에서 펼쳐지는 세계.

그 축소된 풍경 속에서도 어떤 그림들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쿵, 하고 심장을 건드리거나, 짠— 하고 감각을 깨우는 순간처럼.



오늘 만난 내 곁의 그림이 그렇습니다.



책의 저자는 2022년 겨울,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던 중 화가 지희킴을 발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발견’이라는 말은 가볍게 읽히지만, 그 안에는 어떤 낯선 떨림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우연처럼 가장한 필연처럼.


‘find’와 ‘discover’.


둘 다 ‘찾다’, ‘발견하다’로 번역되지만, 그 결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find’가 일상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것이라면, ‘discover’는 덮여 있던 것을 열어젖히고 비로소 마주하는 순간에 가깝지요. 이미 존재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것, 혹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일.


상담을 공부하던 시절, 지도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말과 몸짓을 통해 정보를 ‘찾아내는(find)’ 것을 넘어, 마음의 뚜껑을 열고 그 안을 함께 들여다보며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정까지 ‘발견해야(discover)’ 한다고.


그렇다면, 저자 안동선이 지희킴을 만난 순간은 과연 어떤 종류의 발견이었을까요.

단순히 눈에 띄어 ‘찾아낸’ 것일까, 아니면 그 작품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비로소 ‘알아차린’ 것일까요.


저자가 처음 지희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림 속 식물들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을 느끼고 “어떻게 이런 생명체가 탄생했느냐”라고 물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아마 그것은 ‘find’가 아니라 ‘discover’에 더 가까운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안동선 작가의 <내 곁에 미술> 중에서,

p.59, “식물원에 갈 때마다 현장에서 빠르게 드로잉 했는데 이때 사진을 찍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식물의 형태를 즉흥적으로 재해석하며 드로잉 했기 때문에 그림 속 식물들은 무언가를 닮았으면서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외형을 갖고 있어요. 컬러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에 그 고유함과 특별함을 강조하고 싶어서 여러 물감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 사용했어요.”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p.59, “구아슈라는 수성 물감은 그 이름조차 생소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구아슈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물을 얼마큼 섞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수채화의 맑고 투명한 느낌은 물론이고 두텁게 얹었을 때는 유화의 질감까지 표현할 수 있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과감하게 분출된 비비드 한 컬러를 구현해 주기에 저에게는 최상의 재료예요”


“많이들 사용하는 캔버스는 저를 밀어내지만, 종이는 포용해 주는 느낌이 들어요. 팔레트에 구아슈를 개서 종이라는 표면 위에 얹을 때 저를 쫙 빨아들이는 느낌이 정말 좋아요.”라는 문장들은 오늘 만난 작가 지희킴을

알게 해 주는 정보입니다.



책에는 지희킴 작가의 그림 <증오심으로 불타는>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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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킴, <증오심으로 불타는>, 수채화용 종이에 구아슈, 2022



지희킴 작가의 작품 <증오심으로 불타는>을 마주합니다. 종이에 구아슈로 그려진 이 그림은 처음엔 아름답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름답게 보이도록 나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그 아름다움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감정의 밀도를 시험하는 장치처럼 느껴지는군요.


흘러내린 물감 자국은 감정이 결코 단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듯합니다.

번지고 스며들고, 끝내는 형태를 흐트러뜨리는 감정의 결.

꽃잎 위에 흩어진 불규칙한 패턴들은 애써 붙잡으려 하지만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의 파편 같기도 하고, 미처 걸러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제목을 모른 채 이 그림을 보았다면, 나는 아마 환하게 웃으며 “참 예쁜 꽃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목은 단호합니다. ‘증오심으로 불타는’.


그 순간, 그림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증오심은 뜨겁고, 날카롭고, 직선적이며, 때로는 폭발적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 감정을 가장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꽃’으로 치환합니다. 이 아이러니는 단순한 대비를 넘어, 감정의 본질을 되묻습니다.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격렬함, 혹은 격렬함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아름다움.

작은 개미의 존재까지 세심하게 묘사된 장면은 그 감정의 밀도를 더욱 끌어올립니다. 그것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증오라는 감정이 얼마나 집요하고 유혹적인지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화려하기에 더 가라앉고, 아름답기에 더 고독하고, 그래서 더욱 불안해지는 감정.

그 모든 것을 꽃이라는 형상으로 길어 올린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비로소 한 작가를 ‘발견’합니다.


발견.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마주하게 되는 어떤 존재를.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 발견의 궤적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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