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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망토- 민델로

by 윤재

녹색 망토, 민델로(카보 베르데)


오늘은 카보 베르데의 민델로에 기항하는 날입니다.

카보 베르데(Cape Verde)는 대서양 중앙부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섬나라로, 10개의 주요 섬과 여러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며, 1975년에 독립하였습니다. 케이프베르데(Cape Verde)와 카보베르데'(Cabo Verde)는 같은 나라입니다. 케이프베르데는 영어로,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어로 '녹색 망토'를 의미하지만, 기후와 경제 상황의 변화로 인한 가뭄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카보 베르데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섬이었는데, 15세기 중반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발견했습니다. 이후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하며, 노예무역의 중요한 경유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재의 문화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보 베르데의 문화는 아프리카와 유럽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으며, 음악과 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특히, “모르나(Morna)”라는 전통 음악 장르가 유명합니다. 모르 나는 카보 베르데의 전통 음악 장르로, 슬프고 감성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입니다. 이 장르는 아프리카와 포르투갈의 음악적 요소가 혼합된 것으로, 대개 사랑과 이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의 재즈 여왕 “엘라 피츠제랄드”처럼 카보 데르데에는 모르나의 대표적인 가수인 “세사리아 에보라”와 “마르타 뎀트스(Marta Dia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르나를 통해 카보 베르데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모르나는 카보 베르데의 사회적 역사와 정서를 반영하며, 감정적인 표현력이 뛰어난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Café Atlantic"과 같은 곡들은 그 깊은 감성을 잘 전달하며, 카보 베르데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세사리아 에보라(Césaría Évora)는 "맨발의 디바"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카보 베르데의 대표적인 모르나 가수입니다. 그녀는 독특한 목소리와 감성적인 노래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모르나의 여왕"이라는 칭호는 그녀의 음악이 가진 깊은 감성과 카보 베르데 문화의 상징성을 반영합니다. 세사리아 에보라는 2003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이 공연은 그녀의 음악을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한국 팬들에게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당시 카보 베르데의 전통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그녀의 내한은 이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세사리아 에보라 사진.png



공연에서는 그녀의 대표곡인 "Sodade"와 "Café Atlantic" 등 여러 곡이 연주되었으며, 관객들은 그녀의 열정적인 무대와 감동적인 노래에 큰 호응을 보였습니다. 관객들은 그녀의 목소리와 표현력에 매료되었고, 공연 후에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세사르야 에바라는 한국 팬들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음악을 통한 교감을 깊게 나눴습니다. 그녀의 공연은 단순한 음악적 경험을 넘어서, 문화적 감성을 공유하는 자리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카보 베르데 음악의 아름다움을 한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델로(Mindelo)는 카보베르데의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약 70,000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인구는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아프리카와 유럽의 혼합된 문화적 특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민델로에는 여러 학교와 교육 기관이 있으며, 교육은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카보베르데 전체적으로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있으며, 초등 교육의 의무화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등 교육이나 전문 교육 기관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많은 학생들이 섬 외부로 나가거나 해외로 유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델로의 생활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해변과 시장,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지역 주민들이 일상생활을 즐기며, 음악과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민델로는 특히 음악과 예술의 중심지로, 지역 주민들은 자주 음악 공연이나 문화 행사에 참여합니다. 생활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일자리나 경제적 기회는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농업, 어업, 관광 산업이 주요 산업이며,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관광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민델로는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분에 주민들이 외부 활동을 많이 하며, 공동체 의식이 강한 도시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선사 tour는 Calhau, Cruz de Évora, & Island Drive였는데, 이 지역은 모두 카보 베르데의 산빈센트 섬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가이드는 친절하게 이 투어에 대한 기대를 높이려고 알아듣기 쉬운 발음으로 설명들을 하고 있고, 기사는 묵묵히 앞과 옆을 보며 운전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좁고 구불구불 위험한 산등성이를 버스의 낡은 엔진이 발아래에서 헉헉대며 산길을 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산등성이 휴게소의 시설도 매우 빈약하였습니다. 허름한 어촌 마을도 잠깐 머물렀는데, 구입하기도 민망한 조악한 기념품들을 가지고 구매를 요청하는 아이들의 까만 손과 아이를 안고 물건 판매하려는 여성들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실망스러운 tour였습니다. 크루즈 선내로 돌아와 다음 기항지 tour 때문에 shore exercursion office를 방문했는데 한 승객이 매우 심하게 안전에 소홀했고 화장실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tour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듣는 나는 공감하면서도 민망함을 금치 못했는데 tour office 직원들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난감한 표정으로 듣고 있더군요. 크루즈 선사의 여행 상품 투어가 부실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의 경우 보상을 해 준다고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tour office를 떠난 후 그 승객에게 어떤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항지에 들리는 경우, 크루즈는 아침에 도착해 저녁에 떠나기 때문에 투어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자유 여행이 아니고 선내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한다면, 다양한 프로그램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크루즈 선사에서는 최신의 정보들을 종합하여 투어 프로그램을 구성하긴 하지만, 개인의 요구 사항이 온전히 반영되긴 어렵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형 맞춤 투어도 있긴 하지만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기항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거나, 인프라가 편리하지 않다면 선사에서 운영하는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고비용을 지불하지만 편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선내 투어를 이용했습니다. 여러 가지 상품 중에서 선택을 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투어가 진행되면 금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편한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갑판 데크 의자에 앉아 대서양을 바라보다가 이 대양을 흑인 노예들이 처참하게 이유도 모르는 채 끌려갔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먹먹해졌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받아야 하고, 인권은 타인이 임의로 함부로 탈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 포로나 점령지의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노예무역이 성행되던 시기에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관행이 지속되었습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성행되던 시기에 백인 선장들은 노예를 사는 대가로 공산품, 무기, 럼주 등을 넘겼고 아프리카 왕들과 상인들은 물건과 노예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왕국은 노예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왕들은 자신들의 백성을 팔아 지배 영역을 키우고, 이웃한 적들에게 대척할 힘을 키웠답니다. 유럽의 폭발적인 노예 수요로 극심한 경쟁도 생겨났는데, 노예를 잡기 위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전쟁에 필요한 유럽의 무기 또한 노예를 팔아서 구했다는군요. 노예들은 그들을 구입한 회사의 낙인이 찍힌 채 유럽, 아메리카 대륙으로 지옥과도 같은 항해를 거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항해 중간 바다에 버려진 노예들도 많았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흑인 노예들은 대부분 굶주림, 학대, 고된 노동으로 평균 7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합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15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이루어졌고, 이때 유출된 아프리카의 인구는 대략 1,70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노예제의 어두운 역사,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인용)


노예선의 선장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132명의 살아있는 노예들을 사슬도 풀지 않고 바다에 던지는 사건을 그린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의 <노예선>이 떠오릅니다

바다에서 실종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지만 배 안에서 사망한 경우는 보험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알고 선장이 보험금을 노려 산 사람을 바다에 빠뜨린 사건입니다. 그림 속에서는 거친 파도와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고, 화면 위로는 마치 불이 난 것처럼 하늘이 빨갛습니다. 화면 아래 바닷물 위에는 사람의 신체 일부가 보이고 쇠사슬에 묶인 발목이 보입니다. 물고기 떼들이 몰려들어 인간을 뜯고 먹고 있는 끔찍한 장면이 있습니다. 영국 출신 윌리엄 터너는 영국 최고의 미술상 ‘터너상’의 주인공이며 ‘영국의 국민화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 <노예선>은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전시 중인데, 우리 배는 보스턴에 기항할 예정입니다. 보스턴 일정은 보스턴 파인 아트 뮤지엄 방문을 계획하고 있어, 직접 그의 그림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터너의 시도에 시대의 아픔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png

윌리엄 터너, <노예선, 1840, 보스턴 파인 아트 뮤지엄 소장


담대하고 역동적인 강렬한 색상이 그날의 혼란과 무자비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래 들여다보기 힘들게 만드는 어려움을 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제시되었을 때 혹평을 받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아마 차마 직면하기 어려움을 혹평으로 대체시킨 것은 아닐는지요. 그림의 원제목은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다에 던지는 노예선’으로 보다 구체적입니다.


그림의 무게가 무겁다 보니,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읽었을 때, 아주 심하게 감정 이입이 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읽을 수밖에 없었고, 생각하면 마음이 매우 불편합니다. 무겁고 아팠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조선의 자주국방.

무능하고 시기심 많고, 열등감 많은 선조.

선조의 의심과 간신배들의 모함.

그 속에서 이순신은 어찌 견뎌냈을까요......


그 글 속 문장 일부입니다,

<밥>

p.203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 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끼니들이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군량 없는 수영을 밟고 지나갔다.

그해 가을에 해남, 강진, 장흥, 보성, 승주, 고흥은 수확기에 백성들이 흩어져 추수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래 내려 물에 잠긴 논이 썩었고 멸구가 끓었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해서 노을 속을 날았다.

경상 연안 쪽 추수는 적들이 몰아갔다.

적들은 여수, 순천 너머에 포진했고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들은 연안 육지의 성안에 군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오직 적의 군량을 빼앗기 위한 전투를 궁리해 보았으나 적의 육지 요새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없었고

수군을 육지로 돌려서 육로를 따라 적의 내륙 쪽 후방을 찌를 수도 없었다.

싸워서 먹을 수도 없었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군대가 백성들로부터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


p. 205, 전투가 없어도 끼니는 돌아왔고 모든 끼니는 비상한 끼니였다.

의주로 달아난 임금은 수군의 배고픔과 추위를 뼈에 사무치게 슬퍼하는 교서를 수영으로 보내왔다.

임금의 교서는 울음과도 같았다.....

점심을 거르고, 아침과 저녁에 다섯 호빅 먹여도 사부와 격군들은 하루에 팔십 석을 먹었다.

생선과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수군의 천행이었다.

생선은 어종을 구분하지 않고 한 솥에 넣어 된장을 풀고 끓였다.

둔전에서 나오는 무와 배추를 소금에 절였다.

수졸들이 된장이나 짠지를 담글 때 나는 늘 소금을 많이 넣으라고 일렀다.

동짓달 초하루부터 다섯 홉을 네 홉으로 줄였고 보름이 지나서부터는 세 홉으로 줄였다.

그렇게 모아진 식량을 사나흘에 한 번씩 오는 전령 편에 우수영으로 보내 순천, 여수 쪽 정탐들을

먹게 했다. 겨울은 깊어갔다.

섣달부터는 보릿가루를 물에 타서 저녁을 먹었다.

수상 진법 훈령을 중지했고, 수영 외곽 위병 초소를 반으로 줄였다.

습진과 수영을 오가는 행정선을 줄였고 연안 순찰선의 운행 횟수를 줄였다.............


p.207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그해 겨울의 밥은 무참했다.

끼니는 계속 돌아왔고 나는 먹었다.

나는 말없이 먹었다.

경상 해안 쪽에, 백성의 식량을 빼앗은 적의 군량은 쌓여 있었다.... <칼의 노래> 중에서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선조/임진왜란 편을 줌(zoom) 강의로 들었을 때,

10만~ 40만까지 추정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당시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1/70의 아주 헐값(?)에 조선인 노예가 판매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606년 일본에 포교하러 왔던 피렌체 출신 프란체스코 카를레티 신부(1573~1636)의 <나의 세계 일주기>에 의하면, “나도 조선인 노예 5명을 구입했다. 4명은 중간에 마카오에서 고아원에 보내고, 1명은 데리고 왔는데 그 애의 이름은 ‘안토니오 꼬레아’... “라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벨기에 출신 피테라 파울 루벤스(1577~1640)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의 실제 모델에 대한 분분한 추론(명나라 상인이라는 설과 조선인이라는 주장 등)이 있기도 하지만, 루벤스가 1617년 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복 입은 남자>는 1983년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미국 게티박물관이 당시 소묘 그림으로서는 사상 최고 경매가인 32만 4,000파운드로 낙찰받았다고 합니다.


한복 입은 남자.png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1617년경



작품의 모델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아직 제시된 것은 없지만, 루벤스가 생존할 당시에 이탈리아에 건너간 조선인이라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중 서양 상인들에게 팔려간 사람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400여 명의 도공이 끌려간 도자기 전쟁이고, 노예전쟁이고, 무역전쟁이었다고도 합니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도 책봉한 공신이 30명이었는데,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 나서 선무공신 18명, 호성공신 86명, 청난공신 5명을 책봉하였다는군요. 공신으로 책봉되면, 호위무사, 노예, 전답 하사 등.... 엄청난 보상이 뒤따른다고 합니다.


“내시 24명, 이마 6명, 의관 2명, 별좌/사알 2명 등도 포함되어 선조실록에는 호성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중에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 명이 되었다.

얼마나 외람된 일인가....

천한 것들하고 함께 공신회맹연에 참석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소반의 피를 마시고 맹세했으니

아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라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는군요.



국가가 자주의 힘이 없고, 통치자가 무능하면 결국 일반 평민, 서민들이 고통받음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고통만 받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멸망의 길을 가기도 하는데.......


걱정이 많고 마음이 아픈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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