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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만나는 미술관, 뉴욕

by 윤재




노래 가사이던가요,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등과 비슷한 구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니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좋은 것, 예뻐하는 것들이 달라집니다.

지난날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밝은 색상의 옷들이 좋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기억을 잠식하는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은 반복과 의미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뇌는 의미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기억하고 싶은 정보들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 평소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연관 지어 하나의 이야기 안에 녹여 넣거나 인생 서사의 특별한 순간에 끼워 넣음으로써 기억을 오래 남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시몬 드 보브아르는, “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 제한된 미래와 얼어붙은 과거.

이게 바로 노인들이 맞이하는 상황이다.

많은 경우 이 상황은 노인들을 마비시킨다.

모든 계획이 이미 수행되었거나 폐기되었고, 삶은 스스로 제 문을 닫는다.

그 무엇도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더 이상 그 무엇도 할 것이 없다”라고

노인, 노년을 부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배움에 시간을 쏟는 한가한 노년보다 인생에서 더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라고 키케로는 말했습니다.


눈도 침침해지고, 기운도 딸리는 노년에는 자연만 한 선생님도 없습니다.

그중에서 아름다운 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주는 배움이 됩니다.



니체는 ”우리는 자기 삶의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라고 했듯이, 엄마들은 예쁜 꽃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나 감흥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게 됩니다. 하여 엄마들이 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는 것을 프로필 사진으로 업로드하고, 더 나아가 시를 읽게 되는 거지요.


미술관에 가보면, 꽃을 그린 그림들이 많습니다. 여기 메트로폴리탄도 예외는 아니지요.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박제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뉴욕의 매력“이라는 기사가 <뉴욕 매거진>에 실린 적이 있었듯이 미술관은 아름다움이 집합되어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감정이 흐르는 색의 정원, 빈센트 반 고흐의 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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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가 있는 꽃병, vase with irises>, 1890, Met



1890년 5월, 생레미 요양소에서 퇴원하기 직전에 반 고흐는 네 개의 봄꽃 꽃다발을 그렸습니다. '분홍색 배경'에 '푸른 보라색' 꽃을 배치하여 '조화롭고 부드러운' 효과를 추구했는데, 그 분홍색 배경은 사라지는 붉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희미해졌습니다.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어머니가 소유했고,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소장했다고 합니다. 반 고흐는 그리운 어머니에게 아이리스 꽃다발을 선물한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색을 통해 자신만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가 겪고 있던 심리적 갈등과 감정의 복잡함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아이리스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반 고흐는 아이리스를 그릴 때 그 꽃이 가진 생명력과 에너지, 그리고 자연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아이리스는 고흐에게 있어서 단순히 자연의 일부분을 묘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과 내면적 갈등을 전달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림 속 아이리스들은 고흐의 감정선을 따라 강렬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며, 그와 동시에 고흐가 그린 자연의 다양한 감정적 층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고흐의 특징적인 색채 사용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파란색과 보라색은 차분하고, 때로는 고독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며, 그와 대조되는 따뜻한 색들은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희망적인 요소나 자연의 밝은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아이리스가 있는 꽃병>에서도 그는 꽃과 자연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연이 지닌 강렬한 생명력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꽃병에 담긴 아이리스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화면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고흐는 그들의 동적인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강렬한 붓질과 색의 변화를 사용했습니다. 붓터치는 빠르고 강렬하며, 꽃잎 하나하나와 배경의 선들이 어우러져 자연의 생명력과 그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인 돈 맥클린(Don McLean, 1945~ )은 빈센트 반 고흐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고독한 화가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그의 노래, ”빈센트“



Starry, starry night

별이 총총 빛나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팔레트에 파란색과 회색을 칠하고

Look out on a summer’s day

한 여름날의 밖을 내다봐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영혼의 어둠을 꿰뚫는 눈을 통해

........(하략)..........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889년도 그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에서 가사를 인용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서정적이고 잔잔하며 호소력이 깊습니다. 돈 맥클린은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쓴 반 고흐의 일대기를 읽고 그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을 생각하며 가사를 만들어 갔고, 이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영혼의 화가’로 불리는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로 불꽃같은 열정과 힘찬 붓터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 거장들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존경했습니다. 섬세한 마음을 지녔으며 가난과 고독, 정신질환과 예술적 고뇌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간 고흐는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은 불운했지만 죽은 이후 많은 영예를 누렸지요. 생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지만, 현재 그의 그림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봄에서 여름 초입까지 볼 수 있는 꽃 중의 하나가 붓꽃(아이리스)입니다. 나비들이 무리 지어 한들한들 경쾌하게 날아다니다가 길고 곧은 꽃대에 올라앉은 형태입니다. 꽃봉오리가 먹물을 찍은 붓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니 학구적입니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붓꽃은 풍성하고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현란하지 않고 기품마저 있어 보이는 멋진 꽃입니다. 잎은 난처럼 얇고 길게 뻗어 있으며, 줄기는 휘지 않고 곧게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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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의 무지개 여신 이리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는 무지개를 타고 이동하면서 하늘에 있는 신들의 생각을 지상에 전하는 연락관(메신저)이었습니다. 여신이 무지개다리를 통해 왕래할 때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아이리스랍니다. 신화와 관련된 어원은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촉촉한 봄비가 내린 후나 아침 이슬을 머금고 싱싱하게 피어오를 때 가장 아름답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지개 여신인 이리스 여신의 도움을 받길 원해 무덤 주변에 많이 심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14종 정도의 붓꽃이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꽃말은 좋은(기쁜) 소식, 신비로운 사람, 그리고 존경과 기별 등이 있는데 색상과 종류에 따라 꽃말이 조금씩 다릅니다. 보라색 아이리스는 행운 또는 현명함, 지혜를 의미하고, 노란색 아이리스는 믿는 사람의 행복 또는 열정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칼 모양을 닮은 잎 때문에 기사를 상징하는 꽃으로도 알려져 있고 프랑스의 국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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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 1889, 게티센터



반 고흐는 해바라기 작품도 여러 점 그렸지만 아이리스도 많이 그렸습니다. 오래전에 LA 게티 센터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작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꽃이 만발한 역동적인 아이리스를 보았었는데, 화병 안에 꽂혀 있는 아이리스는 좀 더 단정한 느낌을 줍니다. 1889년 작 아이리스는 황토색 흙이 화면 아래에 깔려 있고 정원의 아이리스꽃들이 풍성합니다.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아이리스들 사이에 흰 아이리스가 하나 서 있어 그 흰색의 아이리스에 더 마음이 갔었지요. 혼자 있는 흰색의 외로움과 고고함이 반 고흐를 연상하게 하여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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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꽃 그림들을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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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협죽도가 있는 정물, oleanders>, 1888, Met


반 고흐에게 협죽도는 "끝없이" 피어나고 항상 "튼튼한 새순을 내뿜는" 즐겁고 생명을 긍정하는 꽃이었습니다. 1888년 8월의 이 그림에서는 반 고흐가 아를(Arles)에서 만든 다른 정물화에 사용했던 마졸리카 주전자에 꽃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반 고흐가 1885년 Nuenen 정물화에 펼쳐진 성경과 대조하여 배치한 소설인 Émile Zola의 La joie de vivre와 상징적으로 병치됩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노란색의 책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습니다. 화면 중앙, 화병 위에 푸른색의 무성한 꽃잎들이 사방으로 펼쳐있어 밖으로 퍼져가는 에너지가 역동적인 생기를 제공합니다.


협죽도(oleander)는 고흐가 그린 꽃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색감을 가진 꽃으로, 고독과 절망,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내포한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고흐는 이 꽃을 그리면서 그 자신이 겪고 있던 감정적 격변을 투영한 것처럼 보입니다. oleander의 꽃잎은 순백색과 핑크색, 붉은색이 섞여 있어 한편으로는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움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고독한 느낌을 줍니다.


<협죽도>에서 그는 강렬하고 비구상적인 붓질을 사용하여 꽃잎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색과 형태의 동적 변화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고흐가 느꼈던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꽃이 주는 감정적 울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꽃을 둘러싼 배경과 공간의 관계는 이 작품을 더욱 감각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 관람자가 꽃을 바라보는 시각적 경험을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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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 꽃병에 담긴 꽃다발, Bouquet of Flowers in a Vase>, 1890, Met



이 정물화는 반 고흐의 편지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의 예술 작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학자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주제는 그가 파리에서 만든 여름 꽃들의 혼합 꽃다발과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팔레트와 스타일, 특히 독특한 파란색과 황토색, 그래픽적인 벽돌 모양의 해칭은 1890년 7월 29일 오베르에서 그가 죽기 직전에 그린 풍경화와 연결됩니다


<꽃병에 담긴 꽃다발>은 여러 가지 색깔의 꽃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으며, 각기 다른 종류의 꽃들은 고흐가 표현하고자 했던 다채로운 감정의 층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꽃들은 희망, 고독, 사랑, 그리고 갈망을 아우르는 감정의 집합체로, 고흐의 복잡한 감정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꽃병 속에서 꽃들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고흐가 겪고 있는 감정의 복잡함과 그 안에서 찾으려는 평온과 균형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고흐는 색의 명도와 채도를 조절하여 그 꽃들이 단순히 아름다운 색의 배열이 아니라, 내면적 갈등과 희망적인 빛을 동시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빛과 색의 향연, 클로드 모네의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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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아이리스가 피어 있는 길, The Path through the Irises> , 1914-1917, Met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 붓꽃은 집과 지베르니에 있는 예술가 사유지에 있는 일본식 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정원 길을 조감한 이 그림은 강렬함과 폭넓은 시각으로 이 꽃의 핵심 본질을 포착한 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려진 일련의 기념비적 작품에 속합니다. 말년에 시력이 약해지자 그는 미묘함을 버리고 "모티프를 대량으로 받아들였으며" "아이디어가 구체화될 때까지, 배열과 구성이 뇌에 각인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예술적 탐구가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인상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명작입니다. 이 작품은 모네 특유의 빛과 색의 변화를 통해 자연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그의 열망이 담겨 있으며, 아이리스가 자생하는 길을 따라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은 감각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깊은 울림을 전달합니다.


아이리스는 그 자체로 우아함과 신비함을 지닌 꽃으로, 모네는 이 꽃을 통해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도, 그 내면에 숨겨진 생명력과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아이리스는 부드럽고 섬세한 색조와 함께 화면 전체에 퍼져 있으며, 그 존재는 단순한 꽃이 아닌, 자연의 깊은 숨결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모네는 아이리스의 꽃잎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그리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색과 빛의 흐름에 집중하여, 그 꽃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자연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꽃들은 서로 연결되며, 관람자는 마치 아이리스의 향기와 색의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감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네의 대표적인 기법 중 하나인 빛의 변화와 색의 다채로운 표현은 이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자연의 빛이 어떻게 꽃과 풍경에 반영되는지를 탐구하면서, 그것을 화면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림에서 햇살은 아이리스의 꽃잎에 반사되어, 부드럽게 빛을 발산하고, 그 빛은 꽃줄기와 꽃잎, 그리고 흙을 통해 또 다른 색깔을 만들어냅니다. 밝고 따뜻한 햇살이 꽃들과 풀잎들을 스며들게 하고, 그 빛의 변화는 작품에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를 담아냅니다. 모네는 빛의 작은 변화를 포착함으로써, 자연이 주는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빛과 색, 그리고 자연의 흐름을 표현하며, 우리가 그 안에서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역시, 많은 아이리스 그림을 그렸습니다. 프랑스 인상파의 창시자로 인상파라는 명칭이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빛은 곧 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같은 주제를 시간과 날을 달리하여 반복해서 그리며 연작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말년으로 갈수록 추상화의 형태와 비슷해졌습니다. 고향에서 외젠 부댕에게서 잠시 수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눈과 느낌에 우선했습니다.


빛과 색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 특유의 작업 방식 등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폴 세잔은 모네를 ’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까지 칭송하며 모네가 자연을 보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파스텔톤으로 은은한 형태를 묘사한 그의 그림은 그리움을 담아 그 길을 걸어보고 싶게 만듭니다.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면서 지베르니에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꽃이다. 항상, 항상 꽃이 내게는 필요하다 “라고 말한 그는 자신이 만든 지베르니의 정원을 사랑했습니다. 모네는 ”내 장례식은 간단하고 종교적이지 않아야 한다. 일반인처럼 묻어주고 내 가족만이 관 주변에 서 있어야 한다. 꽃이나 화환은 안 받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헛된 명예이니라. 이런 일에 내 정원의 꽃을 꺾는 일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상의 고요한 순간- 에드가 드가의 꽃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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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꽃병 옆에 앉아 있는 여인, A Woman Seated beside a Vase of Flowers>, 1865, Met



눈에 띄는 화면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꽃다발과 중심에서 벗어난 인물의 병치, 오른쪽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은 겉보기에 평범하고 삶의 단편적인 관점으로 개인을 포착하려는 드가의 목표를 잘 보여줍니다. 초상화로 간주한다면 여인의 위치가 중앙이 아니고 오른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평론가들은 이러한 배치가 우키요에의 영향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꽃병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은 드가의 친구인 Paul Valpinçon의 아내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풍성한 꽃들이 화사합니다. 테이블 한쪽에는 물이 반쯤 담긴 투명한 물병이 있고 여인은 테이블에 팔을 얹고 턱을 괴고 앉아 무심히 옆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드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들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한 미묘한 감정선을 탐색하며, 꽃과 여성의 존재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은유적이고도 감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냅니다.



이 그림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꽃병 옆에 앉아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고요하고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그 표정은 다소 수동적이고 침잠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며, 내면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드가는 여성을 그릴 때 단순한 미적 요소로서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지닌 감정과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여성의 몸짓은 자연스러우며, 그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선이 흐르는 듯 보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녀의 심리적 상태까지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꽃은 전통적으로 아름다움과 생명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 여성의 감정과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꽃들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여성의 감정이 단순히 고요함에 그치지 않고,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을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꽃의 형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묘사되어, 그것이 여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어떻게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색과 빛의 상호작용- 르누아르의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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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국화 꽃다발, Bouquet of Chrysanthemums>, 1881 , M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Renoir, 1841~1919)는 인물화보다 정물화에서 실험할 자유가 더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작가 조르주 리비에르에게 "꽃을 그릴 때 자유롭게 색조와 명도를 시험해 볼 수 있고 캔버스가 손상될 염려도 덜합니다", "인물화에서는 작품을 파괴하는 데 신경을 쓰기 때문에 이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드러운 붓 터치로 꽃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부드럽게 묘사된 꽃다발이 마치 솜방망이 같아 보이기도 하면서 빈 여백 없이 빡빡하게 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온화한 느낌의 꽃다발이 우리에게 만져보고 싶게 만들면서 평안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국화 꽃다발>은 그의 화려한 색감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돋보이는 정물화입니다. 이 작품에서 국화는 중심적인 존재로, 다양한 색감이 살아있는 꽃들이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국화는 전통적으로 풍요와 장수를 상징하지만, 르누아르는 그것을 단순한 상징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고, 색과 형태를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꽃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질감과 그라데이션을 통해 빛이 꽃에 닿을 때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화의 노란색과 주황색, 빨간색 꽃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풍성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그 위에 반사되는 빛의 미세한 변화는 르누아르의 독특한 색감 표현법을 잘 보여줍니다.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빛과 색의 상호작용입니다. 그는 자연광의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하여, 색이 어떻게 빛에 의해 변하는지를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국화 꽃다발>에서도 빛이 꽃에 닿으며 꽃잎의 색이 미묘하게 변하는 장면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꽃잎의 끝부분은 빛에 의해 투명하게 그려져, 마치 실제로 꽃을 만져본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와 같은 빛의 변화를 통해 르누아르는 꽃이 단순히 시각적 요소만이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도록 만듭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31-1919)는 프랑스의 유명한 인상파 화가로, 빛과 색을 중시한 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가난한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으며, 젊은 시절에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들이 그의 작품에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등과 함께 인상파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초기에는 풍경화와 일상적인 장면을 주제로 작품을 그렸으며, 그가 특히 잘 다룬 것은 빛과 색의 변화였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물의 정원, 춤추는 사람들, 모래밭에서 등이 있습니다. 후반기에는 인물화와 초상화로도 유명하며, 밝고 따뜻한 색조를 사용하여 감동적인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르누아르는 그의 독특한 화풍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붓 터치는 매우 독특합니다. 경계와 윤곽선이 모호하도록 문질러 매우 부드러운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밝고 환한 색을 사용하여 따뜻하고 유려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고 스스로 말했을 만큼 쉴 새 없이 그린 르누아르는 60여 년 동안 약 6,000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인물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모네, 시슬레, 바지유,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게 된 르누아르는 그림 자체를 즐기며 유쾌하게 나누는 대화, 사랑스러운 밀담의 모습, 편안한 휴식과 즐거움이 공존해 있는 유쾌한 풍경들을 평생 화폭에 담았습니다. 낙천적인 르누아르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고 대중이 즐기고 좋아하는 예술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화가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만년에는 지병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잡아매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행복한 순간을 주로 그리며, 따스하고 밝은 분위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스럽게 일하는 것은 모든 질서와 행복의 비밀이다 “라고 말하며 행복전도사로서의 일급비밀을 개방했습니다.




꿈과 색채의 조화로운 만남 - 오딜롱 르동의 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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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르동, <꽃병, Vase of Flowers (Pink Background)>, 1906 , Met



20년 넘게 거의 전적으로 흑백 작업을 해온 르동은 1895년 이후에 만든 야광 파스텔과 그림에서 컬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이 꽃다발에는 그가 주의 깊게 연구했던 양귀비와 수레국화와 같은 식별 가능한 꽃들, 안개 낀 정의되지 않은 들판을 배경으로 보석 같은 색상 패치로 환상적인 재창조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후기 꽃 그림은 "가시적인 것의 논리를 보이지 않는 것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르동의 예술적 목표에 충실합니다.


이 그림은 오딜롱 르동의 독특한 상상력과 심미적 접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20세기 초의 상징주의 화풍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꽃을 그린 정물화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작품으로, 르동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색채의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부드럽고 따뜻한 분홍색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는 꽃들의 섬세한 색감과 강렬하게 대조를 이루어, 작품에 감성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부여합니다. 분홍색 배경은 꽃들의 색이 더욱 돋보이도록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르동은 색을 통해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다고 믿었으며, 이 작품에서 색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를 넘어서, 감정과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베르트랑 장 르동(Bertrand Jean Redon)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판화가, 데생화가, 파스텔 화가였습니다.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이틀 만에 부모와 헤어졌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허약하고 외로운 성격으로 친척의 집에서 성장하며 음악과 시, 미술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둡고 침울했던 성장 과정은 ”슬픈 예술의 원천이자 검은색(Noir) 예술의 근원“이라고 했으며 그 시기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온갖 것들로 상상력을 채우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목탄을 가지고 놀았으며 목탄을 가지고 그리거나 채우는 선과 명암으로 위로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흑백 판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그의 <웃는 거미>와 <우는 거미>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양 축의 상반되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그림들은 표정 이면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전해줍니다. 그의 나이 60세부터 꽃가루가 춤추듯 다양하고 찬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감미로운 느낌을 주는 유화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신화나 종교적인 내용에서 신비한 공상으로 연결되는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하였으며 자신의 집에 화초를 심고 그것들을 대상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르동은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적이고 현명했던 그의 아내 카미유 팔트(Camille Falte, 1853~1923)는 르동의 아내, 친구, 뮤즈, 심지어 조수의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르동의 꽃그림을 위해 야생화를 채집하기도 하고, 꽃과 돈이 없을 때는 자신의 소지품을 팔아 꽃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배려심 깊은 카미유는 르동의 따뜻한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그를 위해 다행입니다. 성장기에 불안정한 애착 상태로 성장했더라도 성인기에 안정적이고 따뜻한 배우자를 만나 르동의 결핍되고 연약한 어린 자아가 보살핌을 받고 성숙하게 된 것은 르동의 인문학적 소양과 지혜로운 카미유의 상호작용 덕분인 것 같습니다.




고요한 자연 속의 섬세한 순간 -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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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카유보트, < 정원 속 국화, Chrysanthemums in the Garden at Petit-Gennevilliers>, 1893, Met



까유보트는 Petit-Gennevilliers에 위치한 그의 집 정원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제는 단순히 정원에 핀 국화들로, 국화는 그 자체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그러나 까유보트는 이 꽃을 통해 그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피어 있는 국화들이 차지하는 중심 공간은 마치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은유하는 듯하며, 풍경과 꽃들이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따라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까유보트의 빛과 색에 대한 탁월한 감각입니다. 국화의 다채로운 색깔은 그라데이션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또한, 꽃들이 펼쳐지는 모양은 마치 관람객을 실제 정원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듯한 생동감을 전달합니다. 까유보트는 풍경의 디테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관람자가 꽃과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적으로 접근합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1848~ 1894)는 평생 정원을 가꾸었지만 꽃 주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1880년대까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893년의 이 작품은 그가 파리 북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인 프티 젠느빌리에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에서 재배한 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국화는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화려한 색상과 동아시아와의 연관성으로 유명했으며, 동아시아의 예술과 문화는 유럽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빽빽하게 핀 꽃을 클로즈업한 이 풍성한 그림은 그가 소유한 3,000평에 달하는 정원의 꽃을 그린 것입니다. 정원의 설계와 식물에 자동으로 급수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각종 희귀 난초를 수집하고 재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원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클로드 모네와 카유보트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씨앗을 교환하거나 선물하기도 했답니다. 안타깝게도 카유보트의 정원은 2차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중심은 국화입니다. 국화는 전통적으로 인내와 고귀함을 상징하지만, 카유보트는 국화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자체의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국화의 다채로운 색상과 풍성한 꽃잎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꽃의 질감과 색감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또한 국화는 꽃잎이 무리 지어 피고, 그 잎사귀가 정교하게 겹치는 모습에서 자연의 세밀함과 질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도 그는 국화의 다양한 색과 함께 자연광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국화의 꽃잎과 잎사귀에 비치는 빛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그 정원의 공기와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게 만듭니다. 특히, 빛과 그림자 사이의 대비가 매우 강렬하게 나타나, 입체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가 일찍 죽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와 같은 행운을 얻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타고난 재능이 가득했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겨우 화가 경력 초기에 불과했습니다 “.... 클로드 모네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프랑스 초기 인상주의 화가로, 법관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법률 공부를 하며 변호사를 준비하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여한 이후 진로를 변경하여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좋은 그림을 알린 화가로서 보다 부유한 환경으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로 알려졌습니다. 카유보트는 남성들의 모습에 집중했으며 노동자에서부터 부르주아 남성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오스만 대로에 있는 대형 아파트의 3층으로 이사한 후 발코니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보면서, 발코니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있는 그림 속의 주인공들에게서 유리되어 있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해집니다. 그가 한동안 소유하면서 살았던 가족 소유의 대저택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 그 집을 직접 방문하면서 당시 저택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재다능한 카유보트는 난초 재배자였으며, 요트 설계 건조가였으며 행정가도 역임하였습니다. 1894년 2월 21일 카유보트는 정원에서 풍경화를 그리던 중 쓰러져 45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명백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언론은 장기간의 질병 또는 뇌졸중으로 추정했습니다.



그의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 1877>는 카유보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빗물에 번진 도로까지 세밀하고 입체감 있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고 있는 남녀가 무심히 한 방향을 같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많이 그린 카유보트지만 이 그림에서는 넓은 거리를 혼자, 또는 둘씩 걸어가는 인물들이 많이 표현되고 있다. 차분한 색상들로 그려진 사람들 간의 거리와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도시의 개인주의와 소외감을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빗물이 남아 있는 도로에 반사되는 빛이 사실적으로 전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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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 거리>, 1877,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19세기 중반까지 파리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부실한 상하수도의 문제는 전염병과 같은 심각한 위생문제뿐만 아니라 좁은 길과 미로 같은 구불구불한 도로망은 교통체증과 더불어 시위대가 쉽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고, 비 오는 날에는 진흙탕이 되는 바닥,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않아 생활하수와 오수가 넘쳐나게 되었지요. 나폴레옹 3세는 시위를 신속하게 진압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파리의 재건설을 추진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기본 방안에 오스만 남작의 구체적인 계획은 오늘날의 파리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당시 파리 시장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은 근대화된 파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기차역과 주요 광장들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대로가 만들어졌고, 도로 주위에는 오스만 양식 건물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건물들을 건축되게 된 것이지요. 파리 시민들은 과도한 공사 비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파리의 재건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파리를 방문했던 미국 작가 헨리 터커만은 ”오스만 남작은 넓은 거리를 조성하고 구역을 정비했는데, 오래된 불결함을 현대적인 우아함을 교체했다 “라고 적었습니다.



산업화 과정의 도시 근대화 과정은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희생이 전제되었습니다.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가난한 철거민들의 이동이 줄을 잇게 된 것입니다. 오스만은 시민 생활 개선, 환경 회복, 도시 재생이라는 공공 이익의 명목으로 토지수용권을 행사해 파리의 빈민거주지역을 해체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오스만이 벌인 사업의 진정한 목적은 내란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도로 폭을 넓혀 바리케이드 설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 병영과 노동자 구역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서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명분은 번듯했으나, 실제는 많은 서민들이 재개발로 인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는 등의 반복적인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강제 이주로 형성된 당시 빈민촌을 다룬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산업화에 밀려난 도시 빈민의 참상을 그린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이 그런 상황을 묘사합니다. 도시 개발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일상 속에 담긴 세련된 미학 - 마네의 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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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꽃, 부채, 진주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Flowers, Fan, and Pearls>, 1860, Met



마네는 꽃, 부채, 진주와 같은 소품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일 수 있지만, 마네는 그 속에 풍부한 상징과 미적 가치를 담아냈습니다. 꽃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순환을 암시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부채와 진주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을 나타내며, 당시 상류층의 세련된 취향을 반영합니다. 마네는 이들 물건을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그들 간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시각적인 흥미를 유발하며, 각 아이템의 형태와 질감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마네의 독특한 기법은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밝고 명확한 색조를 사용하여 물건들의 선명한 윤곽을 강조하며,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그들 간의 미세한 빛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특히 꽃잎의 섬세한 주름, 부채의 나무 결, 진주의 반짝임은 마네의 세심한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는 사실성은 물리적인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각적인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마네의 <화가의 부모의 초상>(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도 그림 속에 묘사된 것과 같은 금색과 파란색 무늬의 식탁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마네의 최초의 꽃 그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네는 이 정물화를 예술가 베르트 모리조의 여동생 이브에게 주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여였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꽃은 순진함과 무상함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존재의 짧음과 삶의 덧없는 즐거움을 상기시켜 줍니다. 꽃은 자연과 사계절을 상징합니다. 정물 속의 꽃은 과학과 자연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화병에 꽂혀 있는 커다란 두 송이 꽃과 바닥에 놓여있는 꽃송이는 아름다움과 생명의 덧없음을 상징하면서도 그 자체로 감각적이고 향기로운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이 쉽게 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꽃을 통해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예술에서 부채는 사랑, 욕망, 거절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부채는 사랑이나 욕망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부채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우아함과 세련됨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그 부드러운 선과 섬세한 재질은 마치 여성의 손끝에서 풀어지는 기품과 고요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채의 휘날림은 감각적인 유혹을 상징하며, 한 번 쓱 휘둘러질 때마다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진주는 고귀함과 세련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보석으로, 그림 속에서 그 자체로 섬세하고 반짝이는 존재감을 발산합니다. 진주의 부드러운 빛깔은 고요한 우아함을 나타내며, 여성의 품위와 매력을 강조합니다. 그 빛나는 표면은 마치 한 순간의 사랑과 욕망을 담아내듯, 시선을 붙잡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감각적이고 섬세한 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과 감정을 탐구하는 마네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각각의 물건이 전하는 메시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각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8대째 지주인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습니다.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면서 모델에 대한 드로잉을 충분히 익혔고 여러 미술관에서 스페인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화단을 풍미한 주요 화법들을 익혔습니다. 자신만의 회화양식을 발견하기 위해 벨라스케스를 위시한 스페인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였습니다. 국전인 살롱전에서 계속 낙선했던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낙선작!!! 낙선작을 통해 알려진 <올랭피아>는 전통과 모던을 구분하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라파엘로풍의 <파리스의 심판>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들입니다. 바지유, 판탱라투르,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화실과 그들이 자주 가던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미술사학자 존 리월드는 “소심한 예술가들이 코로의 영향을 받았다면, 대담한 예술가들은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라고 평했습니다.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들 중의 하나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나,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 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지고,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습니다.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말년에 매독 합병증으로 죽어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그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말년이 가까워지자(그는 51세의 나이로 사망) 마네는 절묘한 꽃다발과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 활기차고 생명을 긍정하는 캔버스를 그렸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픈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중략).....

모든 꽃이 다 달콤한 향기를 내지는 않는다.

꽃은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라고 <꽃이 되어 새가 되어>란 시에서

아름다운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아픔과 슬픔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자연 속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이 듦에 대한 노련한 통찰은 배우 윤여정 선생이 그녀가 69세일 때 했던 인터뷰에서, “ 나이 60이 돼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도 이 나이가 처음이야. 그래서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중년 전문가 윌리엄 새들러는 그의 저서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에서, 마흔 이후의 삶이 앞선 세대처럼 인생의 하강기가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하며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에게 환호받을 내용이 아닐 수 없지요.


저자는 마흔 이후 인생의 2차 성장을 위한 여섯 가지 원칙은, 중년의 정체성 확립하기, 일과 여가활동의 조화,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라고 제안합니다.


저자는 그의 책에서 ‘일’에 대한 정의를 신선하게 정의합니다. 일이란 비단 돈을 받고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P.118) 이에 따르면 여가활동, 취미활동, 관심 있는 것에 대한 공부, 지역사회 봉사 활동 모두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사의 일과 나머지 일 간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엄마의 프로필 사진에 꽃이 많이 담기고, 비록 그 꽃은 유한하지 않더라도, 엄마들은 꽃그림들을 보며 에너지와 조화로움을 충전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서구 문명을 가장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교과서”라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꽃밭을 떠나며 드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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