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서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김경민 지음<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사랑, 삶 그리고 시> 중에서,2020,포르체
시인 정양(1942~ )은 김제시에서 태어나 1968년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인은 우석대학교에서 ‘언제나 즐겁고 유익하게 강의’를 하셨답니다. 시집 6권과 평론집·산문집 각 2권 등을 썼고, 모악문학상, 백석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정양 시인은 “손창섭의 소설‘혈서’에서 혈서 쓰듯 순간을 살고 싶다며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쓰자던 주인공처럼 나도 혈서 같은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껏 이를 악물고 시 쓰는 일에 전력투구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래전에 썼던 내 시들을 보면 고치고 싶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나는 지금도 그 모자란 부분들을 낯을 붉히며 손질하곤 합니다. 누군가는 나의 그런 뒤늦은 퇴고에 대하여 일단 발표된 작품을 다시 손질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쓴 작품들을 고쳐야 할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것 같고 실제로 내가 쓴 시들은 그처럼 전력투구를 하지 않은 티가 지금도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라고 오래전 한 매체의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선생은 긴 다리로 물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왜가리 같다. 정작 물고기 사냥에는 별 관심이 없고 물소리에 가만히 귀를 열어두고 있는 왜가리.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기린 같은 사내라고 했고, 또 절친한 친구 윤흥길 선생은 ‘물견’(물건)이라 했다. 그 이유는 “그는 내 가난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끊임없이 내게 영감을 나누어 주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또 때로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섬찟 찔러 주기 때문”이라는 것“.... 이렇게 시인 안도현 님은 우리에게 시인 정양의 발견을 알려줍니다.
모래밭에 쓴 글이라니
어찌 무심한 밀물이 다가옴을 막을 수 있을는지요.
가을 바다
청명한 하늘에서는 분명 더 선명하게 모래밭 글씨가 뚜렷하게 가 닿겠지요.
보고 싶어 죽겠다는데 막말일 수는 없을 텐데
유한한 시간 속에서 가느다란 기대와 소망이
얼음 조각처럼 사라지는 시간성 속에서 부재하게 될 주인공의 간절함이 안타깝습니다.
토막말 ‘씨펄’이 자극적이지만 요즘 같은 세태에는 폭력적으로 들리지도 않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 얼마나 깊고 큰 그리움이면 하늘에서 보이도록 대문짝만 하게 쓸까요
절절하고 애타는 누군가의 사랑,
그 사랑의 흔적을 정순이는 모르고 저녁놀이 새겨 읽고 있네요.
오늘
시인 정양님 덕분에
제 가난한 마음이 조금은 윤택해졌습니다.
사랑하는 법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