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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무릎이 까진다

by 윤재

19. 날짜변경선


이설야


바뀐 주소로 누군가 자꾸만 편지를 보낸다


이 나라에는 벌써 가을이 돌아서버렸다

매일 날짜 하나씩 까먹고도 지구가 돌아간다

돌고 돌아서 내가 나에게 다시 도착한다


지금 광장에서 춤추는 소녀는 어제 왔지만

나는 내일 소녀를 만날 것이다

만년 전 달려오던 별빛이 내 머리 위를 통과해갔다

그래서 오늘은 너와 헤어졌다


검은 재를 뒤집어쓰고

우리는 매일 무릎이 까진다


나에게 도착한 미래가

어제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


그래,

이제 이 나라에서 입력한 날짜들을 모두 변경하기로 하자

휙휙, 나무들이 날아가고

섬들이 날아가고, 낙엽이 빗방울처럼 날아가고

날아가고, 날아가는 것들

뒤바뀐 날짜를 버리기로 하자

버리고 버려서

가슴속엔 새로운 정부를

모든 경계선을 지워가며


--안희연, 황인찬 엮음,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 2024



이설야 시인은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은 하나하나의 삶의 경험을 가는 실로 한 땀 씩 엮고 꿰맨듯한 시적 진정성과 자신만의 시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강인함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시인에게 그가 태어난 인천은 한 번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적이 없었답니다. 도시의 풍경은 아프도록 남루했고, 삶은 고통스럽게 슬펐답니다. 떠나고 싶었지만 번번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도시에서, 시인은 여린 마음을 할퀴는 거친 모래 같은 아픔을 곱씹어 진주를 닮은 시를 쓴다고 인터뷰 기사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가난이 시인의 꿈을 가로막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오랜 꿈을 이루어냈습니다. 시인은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미술동아리와 문학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인은 최고의 예술은 시라고 생각한답니다.


시에는 모든 예술이 다 있다고, 그래서 퇴고를 많이 하고, ‘고치는 게 자신의 작법’이라고 말하며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친답니다. 시인은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를 좋아하며, 자신도 오래오래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다른 장르와의 결합도 시도해 보면서...


그러나 시인은 아직도 시가 뭔지 모르고 평생 모를 수도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시인은 고산문학대상 신인상과 박영근작품상을, 그리고 난설헌 시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날짜 변경선은 경도 180도를 기준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날짜를 구분하는 선입니다.


이 시는 이설야 시인이 표현한 깊은 시간의 흐름과 인간 존재의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시간의 경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겪는 감정, 기억, 그리고 삶의 이치를 반영하는 복잡한 감정선을 그려냅니다.


먼저, 시는 "이 나라에는 벌써 가을이 돌아서버렸다"라는 문장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암시합니다. 가을은 변화를 상징하는 계절이며, 시인은 이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 지나가는 일상적인 기억들을 잊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립니다. ‘까먹은 날짜가 돌고 돌아 나에게 다시 도착한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과거가 사라져도 자연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잃어버림과 회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어제 왔던 춤추는 소녀를 내일 만날 것이라는 것은 시간을 넘어선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날 미래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의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통해 이어지는 복합적인 차원으로 펼쳐집니다. ‘만년 년 전 달려오던 별빛이 내 머리 위를 통과해 갔다"라는 표현은 우주적 시간과 인간의 일상적인 삶이 하나로 얽혀 있음을 시적으로 드러냅니다.


시의 후반부는 과거의 틀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시작과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메시지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인이 제시하는 "변화"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는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인 변화, 사회적인 변혁, 그리고 인간관계의 변화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시의 흐름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마주치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은 그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찾고자 합니다.


이설야 시인의 날짜변경선을 읽으면서 시간과 그 흐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제공해 주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이 떠오릅니다. 달리는 시계를 녹이듯 표현하면서 시간의 상대성, 즉 시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다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국제 날짜선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1931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간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독특한 시각적 접근을 보여주며, 시간과 기억의 개념을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림 속에서 달리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풀어내고, 그 흐름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어떻게 상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png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MoMA


그림의 중앙에는 몇 개의 녹아내린 시계가 등장하는데, 시계들은 마치 부드러운 치즈처럼 흐물흐물하게 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계의 왜곡은 물리적인 시간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며, 시간이 단지 기계적인 틀에 갇힌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달리는 시간을 고정된 개념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그림의 배경은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상상 속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은 어떤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꿈속의 공간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배경은 시간과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심리적,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실제 시간의 흐름과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시간은 더 유동적이고 다채롭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의미의 날들이 다가옵니다.

경계선을 지우고 화합으로 가는 복된 날들이

우리에게 도착한 미래는 어제보다 괜찮아졌다고 하겠지요

그래,

이제 여기서는 입력한 날짜들을 변경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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