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만해집니다.
김사인(1956~ ) 시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중 한 명으로, 인간의 삶과 고통,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고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왔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등이 있으며, 일상의 사소한 경험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또한 그는 시 창작뿐만 아니라 문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으며, 인간과 자연,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학적 태도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고,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연륜 있는 시인입니다.
김사인 시인의 시 <공부>는 2022년 봄, 서울 광화문 글판에 올라온 글이기도 합니다. 글판 운영자인 교보생명은 “봄 편 문안으로 선정된 시는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과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인생 공부’라고 비유한다”며, “겨울과 봄이 바뀌는 계절의 틈새에서 우리를 위로하는 공동체의 따뜻한 시선이 있음을 떠올리자는 뜻으로 이번 문안을 선정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사진 출처: 김흥순 노트님의 게시물에서
김사인 시인의 시 <공부>는 단순한 학문의 개념을 넘어, 인생 자체를 ‘공부’로 바라보는 시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배웅하는 일조차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시에서 묘사되는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들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과 그것을 지켜보며 견디는 것 또한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인생이라는 크고도 넓은 학교.
우리의 삶 과정 전부가 공부하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는 공부는 현재진행형(Learning)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작가 유시민은 나이 들수록 미친 듯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이것저것 배울 것이 너무 많아 바쁜 일상입니다.
김사인 시인의 시 <「공부>는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경험을 ‘공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들의 입장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큰 공부’라고 표현하며 삶의 모든 과정이 배움임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관점은 제 삶 속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시의 첫 연에서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는 순간, 시인은 무언가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 남아서 배웅하는 일조차도 배움의 과정이라는 인식은 슬픔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겠지요.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삶의 필연적인 흐름을 받아들이는 깊은 성찰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어지는 연에서는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 같다’는 표현을 통해, 시인이 느끼는 위로와 따뜻함이 묘사됩니다. 삶의 힘겨운 순간에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엿보이며, 이러한 감정은 제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위로는 직접적인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움직임으로 존재하지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이라는 구절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자연의 변화와 삶의 흐름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요즘 매우 춥습니다.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과 같은 자연 현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며,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이라는 구절은 죽음과 탄생이라는 삶의 순환을 나타내며, 우리 존재의 유한함과 필연성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다시 한번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며 시를 마무리하는데, 이 구절은 앞서 언급된 모든 감정을 아우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적 태도-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집니다. 힘든 순간에도 배움의 과정이라 생각하면 조금은 견딜만해진다는 깨달음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시에서 묘사되는 담담한 어조와 묵묵한 수용의 태도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김사인 시인의 <공부>는 삶의 다양한 경험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시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니콜라스 푸생의 <시간의 음악에 맞춘 춤(A Dance to the Music of Time)>이 떠올랐습니다.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불리는 화가로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보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 역사, 문학은 특히 로마에서 보낸 초기 시절에 그의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어 고전주의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니콜라스 푸생, <자화상>, 1650, 루브르 박물관
푸생의 나이 56세, 당시 그는 투병 중이었는데 후원자이자 친구의 의뢰로 자화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진중하게 앞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약간 처지게 그린 입 모양에 슬픔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초상화를 넘어, 그의 예술적 태도와 신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그는 세밀한 붓질과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여 고전적 안정감과 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자신을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바라보는 자세로 배치하여 깊이감을 주었습니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정면 자화상과 차별되는 점으로, 그의 내면적 성찰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면 속 캔버스(또는 책으로 보이기도 하는)와 자긍심을 드러내는 듯한 반지도 주목할 만 것으로 자신이 일하는 분야의 전문성에 대한 유능감과 학문적 탐구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니콜라스 푸생, <시간의 음악에 맞춘 춤, A Dance to the Music of Time>, 1636, Wallace Collection,
런던
푸생의 그림 <시간의 음악에 맞춘 춤(A Dance to the Music of Time)>은 1634~1636년경 제작된 작품으로, 푸생의 예술적 특징이 잘 드러난 걸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과 시간의 흐름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회화적 구성이 뛰어난 동시에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림의 중심에는 네 명의 인물이 서로에게 등을 보인 채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원형으로 빙빙 돌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인간 삶의 단계를 상징하는 인물들로 해석되며, 보통 ‘빈곤/가난(Poverty)’, ‘노동/근면(Labour)’, ‘부(Wealth)’,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겪는 희로애락이 시간과 함께 지속적 순환적 과정을 상징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푸른 옷을 입고 장미 화관을 쓴 여인은 쾌락, 마치 흥겨운 유흥에 동참하라는 듯이 유혹적인 눈길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고 진주로 된 머리 장식을 한 여인은 부, 쾌락과 부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을 꽉 잡고 있습니다. 반면 부는 자기 옆의 여인의 손을 잡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신발도 없이 행색이 초라한 이 여인은 빈곤, 빈곤은 어떻게해서든 부의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녹색옷을 입고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쓰고 있는 남자는 노동, 우리가 근면하게 일을 하는 이유는 부를 쌓기 위함일진대 노동 역시 힘겹게 고개를 돌려 부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고 있는 것은 인생의 되풀이 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춤은 한 명의 음악가가 연주하는 리라(lira) 소리에 맞추어 진행되는데, 이 날개를 단 연주자는 바로 시간(Time) 그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로 해석됩니다. 이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 또는 ‘카이로스(Kairos)’와도 연결되며, 시간의 불가역성, 즉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노인은 시간의 신 <사트루누스>. 음악은 언젠가 그칠 것이고 그는 날개를 펴 하늘로 돌아갈 것이며 그때는 흥겨운 춤도 끝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일시적이고 허무한 삶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림 하단 양 옆에 있는 아기 천사들도 인간의 덧없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림 오른쪽의 아기 천사(putti)는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고, 왼쪽의 아기 천사는 비누 방울을 불고 있습니다. 이는 덧없는 시간과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풍요의 신(Fortuna)’ 혹은 ‘허영(Vanity)’을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됩니다. 그림 왼쪽에는 두 얼굴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야누스신입니다. 젊은 얼굴은 미래를 응시하고, 나이든 얼굴은 과거를 바라봄니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야누스는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석상에 걸린 꽃목걸이는 곧 시들어 버리겠지요. 즉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짧은 순간을 살다가는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유한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상단 배경에는 태양의 신 아폴로가 모는 전차가 구름 위로 떠오르고, 전차의 방향에 따라 어둔 밤하늘이 서서히 걷힙니다. 그가 들고 있는 커다란 원반은 영원을 상징합니다.
그 뒤로 계절의 여신들이 전차를 따라 춤을 추고, 선두에는 새벽의 여신 오로라(새벽)가 꽃가루를 뿌리며 아폴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낮과 밤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 안에서 계절의 여신들은 덧없는 세속적인 춤이 아니라 영원한 춤을 출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되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음악에 맞춘 춤>은 푸생의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완성도가 집약된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푸생의 그림 속 인물들이 끝없이 춤을 추듯, 시인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살아갑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일조차도 ‘큰 공부’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경험이 결국 삶을 배우는 과정임을 시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 시작과 끝을 반복하며,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겠지요.
”인상주의의 푸생“으로 묘사되기도 했던 폴 세잔은 “푸생을 보고 떠날 때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사인 시인의 시와 푸생의 그림은 삶과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며, 우리가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공부’ 임을 가르쳐줍니다. 시 마지막 구절, ‘다 공부지요’라는 말처럼, 삶의 과정은 곧 배움의 연속이며, 그 배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의미일 것입니다. 김사인 시인은 서정적인 시어로, 푸생은 고전주의적 회화로,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순환성과 필연성을 표현합니다. 김사인 시인의 시와 푸생의 그림을 보며,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