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오후 여섯 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라는 김경미 시인의 시를 만났을 때, 하루 종일 저의 퇴근을 기다리던 아이의 간절하고 여린 눈망울이 되살아났습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면, 옛 직장 상사는 종종 '자, 회의 합시다'라면서 미팅룸으로 직원들을 갑자기 소집했습니다. 어쩌지요, 퇴근길은 밀리고 막힐텐데. 내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불참’의 종이 울렸겠지요.
간결해서 강력한 시인의 <불참>이란 시가 예전 저의 낙담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습니다.
김경미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미안하다 오후 여섯 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신경림외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2024, 창비시선 500 특별시선집
시인 김경미는 1959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3년[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창비),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 비), 『밤의 입국심사』(문학과 지성사)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바다, 내게로 오다』, 『행복한 심리학』, 『심리학의 위안』, 『그 한마디에 물들다』, 『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과 함께 방송국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을 수상 (2007)했습니다.
노작문학상, 서정시학 작품상, 2024 김종삼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반어와 역설을 활용하여 슬픈 웃음과 유쾌한 외로움을 절묘하게 표현했고 그것을 통해 외롭고 낮고 소박한 존재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저절로 드러나게 했다”라고 2024 김종삼 시문학상 운영위원들은 김경미 시인의 시를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가족이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의무에 얽매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참석’하는 것이 다정한 미덕이 되고, 무언가를 거절하거나 빠지는 것은 무책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 <불참> 속 화자는 단호하게 물으며 말합니다.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
이 물음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기분이 ‘허름하다’고 표현하며, 마치 낡고 초라한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 자신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억지로 웃으며 사람들을 만나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잠시 멈춰야 할까요?
"미안하다 오후 여섯 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
이 구절에서 화자는 시간에게 사과하고 있네요. ‘오후 여섯 시’는 약속이나 모임이 예정된 순간이겠지요. 또는 자신에게 부과된 기대나 의무를 의미하기도 하겠지요.
사과를 할지언정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며 참석하지 않기로 하는 것!
그저 단순한 약속 불참이 아니라, 주어지거나 약속된 기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선택처럼 보이며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미움받을 수도 있겠지요
험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요.
이 시가 주는 울림은 큽니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또는 종종 ‘허름한 기분’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려 하기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시는 그런 용기의 중요성을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 자신의 행복을 놓치는 실수를 해서는 안되고,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욕구’를 포기하면 평안해진다는 오래전에 한동안 인기 서적이었던 <미움받을 용기>가 생각나는 시이기도 합니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상담이론을 기반으로 한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적 윤리적 규범이나 기대들이 부과하고 있는 것들에 우선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며, 지금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의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허름한 기분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행복해질 용기라는 것이지요.
이 시를 읽으며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 1834~1903)의
그림 <화가의 어머니:회색과 검정의 배열 No. 1, 1871>가 생각납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 회색과 검정의 배열 No.1>, 1871, 오르세미술관
그림 속 여성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 앞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입니다. 그녀의 표정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도 무겁습니다. 이 시가 내면의 허름한 기분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면, 이 그림 역시 한 사람이 조용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묘사가 안정감을 주지만 쓸쓸함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휘슬러의 절제된 색감과 단순한 구도는 감정을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하며, 그 자체로 ‘불참’의 분위기를 닮아 있습니다. 시를 읽고 이 그림을 본다면, 사회적 관계에서 한 발 물러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의 어머니인 안나 맥닐 휘슬러(Anna McNeil Whistler)를 그린 그림으로 흔히 '빅토리아 시대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국 미술품 중 하나로 꼽히며,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전체 구성은 좋은 어머니이자 주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품위 있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겸손함을 강조합니다.
휘슬러가 렘브란트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이 그림은 단일 색상의 톤을 조절하는 휘슬러의 급진적인 방법의 정점을 나타냅니다. 물감은 마치 표면 위로 내뿜어진 것처럼 부드럽고 거의 흐릿해 보입니다.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는 단순한 구도를 통해 깊은 정서적 울림을 전달합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침묵과 고독 속에서 내면을 응시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휘슬러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는 기존 예술의 형식적 규율에 얽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휘슬러는 그림과 음악이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그림에 음악과 악기와 관련된 제목을 달았습니다. 휘슬러는 음악처럼 캔버스 속의 구도와 색채를 통해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했고, 충돌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헌신적인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수용하지 못했고, 참된 사랑을 했지만 오해를 하고, 정직과 겸손이 미덕이던 시절에 불같이 용맹한 호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영국 출신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과의 명예훼손 재판건은 유명합니다. 그는 “예술은 단순히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그림에서 잘 드러납니다. 〈화가의 어머니〉 역시 감정이 절제된 색채와 단순한 구도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강조합니다. 그림 속 어머니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그 차분한 자세와 응시하는 시선 속에서 고독과 사색이 전해지지요. 처음 이 그림의 제목은 회색과 검정의 배열 No. 1이었지만 <화가의 어머니> 또는 <휘슬러의 어머니>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을 시 <불참>과 연결해 보면, 두 작품 모두 ‘참여하지 않음’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고 보입니다. "반어와 역설을 활용하여 슬픈 웃음과 유쾌한 외로움을 절묘하게 표현했고 그것을 통해 외롭고 낮고 소박한 존재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저절로 드러나게 했다”라고 2024 김종삼 시문학상 운영위원들의 평가와 충돌적인 삶을 살았던 휘슬러의 시간이 중첩되는 것을 봅니다.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 시의 첫 구절은 마치 휘슬러의 어머니가 덤덤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도 겹쳐집니다. 인물은 특별한 감정 표현 없이 가만히 존재할 뿐이지만, 그 고요 속에서 깊은 내면의 울림이 전해집니다.
"미안하다 오후 여섯 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휘슬러의 그림 속 어머니 역시 마치 세상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듯합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이처럼 시와 그림은 모두 불참을 통해 더 깊은 사색과 감정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소통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참여하지 않는 것, 고요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휘슬러의 그림과 <불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모든 모임에 참석해야만 하는가? 때로는 불참을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도 있지 않은가?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르게 내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참이 반드시 공허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휘슬러의 그림 속 어머니처럼, 또는 시 속 화자처럼, 우리는 불참을 통해 오히려 더 깊고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