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을 떨며 사는 것이 연명하는 일이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 때 최승자를, 썼다.
쒀 먹었다.
시, 하면 최승자가 안 되지만, 죽, 하면 그게 또 최승자가 되는 신비로움이여!”...(김현 시인)
“최승자는 내게 슬픔의 강인한 목소리다.
슬픔이 선인장이라면 그녀는 선인장을 힘껏 껴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고독한 싸움은 희망이 쉽지 않음을, 그러나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문보영 시인)
“‘오물’의 자리가 어쩌면 시의 자리라는 것, 나는 그것을 최승자의 시를 통해 알았다”...(신해욱 시인)
“빈곤한 우리 삶과 육체를 압도하는 아득한 정신성을 나는 언제나 최승자 선생의 시에서
만난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기쁨이고 귀한 아픔이다”....(황인찬 시인)
위 글들은;
많은 시인들의 첫사랑 대상자인 - (혹) 잊을 순 있어도, 잃을 순 없는 -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 시인에게 보내는 시인들의 글 중 일부입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2021 중에서
“한번 생긴 공포는 무수한 세포분열을 하며 뚱뚱하게 살찌고, 그렇게 해서 우리 존재의 바탕에 자리 잡은 공포는 우리의 저 깊은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를 조종하면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고,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이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많은 죽음의 형식을 실험하고 시연하지.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공포가 꽃수레에 올라타고 자신의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지도 몰라. 공포가 자신의 파괴성을 못 이겨 죽음으로써 자신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지. 한번 생겨나 확장하면서 힘을 얻은 감정은 그 자신의 힘과 무게를 주체 못해 바깥으로 쏟아져나올 수밖에 없어. 그렇게 바깥으로 쏟아져나옴으로써 생기는 갖가지 사건과 관계와 상황으로 이루어진 감옥 같은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condition’의 정체일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마지막, 최후의 ‘condition’이 한 사건으로서의 죽음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는 공포와 더불어 그것의 목적지인 죽음에 대해서 얼마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면서, 끊임없이 죽음과 불행과 절망을 토해내던 쥐, 그 쥐의 울음, 그것이 내 시들이었을까?“...p, 162~163,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2021 중에서
최승자(1952 ~ ) 시인은 1979년 계간「문학과 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 온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존재의 불안, 내면의 고통, 그리고 사회적 억압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발표된 그의 시들은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고통이 얽힌 독특한 서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은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며, 날카로운 언어로 인간 실존의 상처를 기록했지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문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하며 시 창작과 번역 작업을 해오다가, 1998년 시집 『연인들』을 펴내던 중 발병한 조현병으로 정신과 병동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서양 점성술과 신비 체계, 지나서는 노자와 장자 사이 “어떤 비밀스러운 다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그러나 해체는커녕 구조를 보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그 다리 위에서 “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발병 이후 입원과 퇴원, 재발과 입, 퇴원을 반복하다가 건강을 회복할 때마다 시집을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저서로 시집『이 시대의 사랑』,『즐거운 일기』,『기억의 집』,『내 무덤 푸르고』,『연인들』등이 있고, 역서로『굶기의 예술』,『상징의 비밀』,『자스민』,『침묵의 세계』,『죽음의 엘레지』,『워터멜론 슈가에서』,『혼자 산다는 것』『쓸쓸해서 머나먼』『빈 배처럼 텅 비어』, 외 다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어떤 나무들은』 등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던 시인의 시는 삶에 대한 애착과 허무가 담겨 있으며 작품세계가 어둡고 자기 개방도 투명합니다.
“나는 첫사랑에 훌륭하게 실패했다”며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 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라고 시인은 그의 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의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20년 후에, 지(芝)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중에서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는 마치 긴 유서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선언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아슬아슬한 아름다움과 떠나야만 하는 존재의 숙명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삶의 찰나적인 순간과 필연적인 소멸을 동시에 직시하게 되며 이 시가 담고 있는 깊은 애정과 슬픔은 최승자의 삶을 반추하게 만듭니다. 만일 이 시의 대상 “지(芝)‘가 실존 인물이라면 지금은 40년을 훌쩍 넘긴 나이겠지요. ”지(芝)“는 아슬아슬한 아름다운 삶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이 시에서 시인은 ”지(芝)“라는 존재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감각을 가진 존재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될 희로애락을 바라보며, 그는 ‘강물처럼 흘러가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화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깊이깊이 가라앉는 것’이라고 선언하는군요. 이처럼 그는 젊고 새로운 세대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을 예견하면서도, 스스로는 소멸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승자 시인은 오랫동안 정신적·육체적 질병과 싸워왔으며, 여러 차례의 침묵과 복귀를 반복해 왔기에 그의 작품에는 삶을 향한 강렬한 애착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공존합니다. 시인의 삶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절박한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종종 고통스럽고, 어둡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솔직하고 아름답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
시의 후반부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 표현하지만 그 죽음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한 문턱으로 보입니다.
그는 남겨진 자들에게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소중한 은화 한 닢을 던져 주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단순한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나눔과 공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지요.
함께 나누며 의지하며 사는 세계를.....
어제저녁엔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한 과제>라는 주제의 경제학 전공 교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소득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암울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진 우리의 경제 상황에서 결국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교수의 제안에 공감하였습니다.
권력욕구가 강한 정치인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으려면,
공적 영역에서 가능한 최선의 증거에 반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 입각한 믿음인 - 오정보(misinformation)인 부정적 루머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것을 분별하려면,
유권자인 우리가 깨어 있어야겠지요.
휴...
민주 시민으로서 학습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그의 저서 『인생의 역사』에서, “진실과 허위를 분별하는 감각이 예민하고 그 둘의 뒤섞임을 못 견디는 이에게는 살아있음 자체가 항구적인 정신적 투쟁일 것이다. 그 투쟁이 2000년대 초반 이후 그를 정신분열증으로 이끌어 갔으리라. 입원 중이었던 2010년 당시의 어느 인터뷰에서 몸무게 34㎏의 그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할 때 그는 이번 생의 승자처럼 보였다. 재작년에 퇴원한 시인의 건강을 빈다. 부디 그의 가까운 곳에, 그를 다정히 안아주는 사람들이 많기를”라고 하면서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를 말하고 있습니다.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는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Tod und Mädchen)>와도 깊은 공명점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로, 인간 존재의 고독과 불안을 강렬한 선과 색채로 표현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미적 탐구를 넘어,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늠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작품은 한 남성이 죽음처럼 보이는 존재로 묘사되며, 그 품에 안긴 한 여성이 불안과 애착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마치 생과 사가 한순간에 얽혀 있는 듯한 장면은 최승자의 시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아슬아슬함과 닮아 있습니다. 실레는 이 그림을 통해 삶과 죽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 안으며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이는 최승자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시인은 ‘깊이깊이 추락하는 일’을 자신의 몫이라 표현하며, 젊은 세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지만, 그 속에는 삶과 죽음이 한 몸처럼 맞닿아 있음을 인식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오스트리아 미술관
이 그림은 1915년에 제작되었으며, 실레가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질(Wally Neuzil)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한 남성이 마치 죽음의 형상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품에 안긴 한 여성이 절망과 애착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지요. 남성은 마치 죽음처럼 검고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여성은 그의 품속에서 벗어나려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인간이 삶과 죽음, 애정과 절망 사이에서 겪는 감정의 복잡성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실레 특유의 날카롭고 왜곡된 선들은 인물의 감정을 더욱 강조하는데, 이는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안과 갈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마른 신체, 비정상적으로 가느다란 팔, 긴 손가락, 비틀린 자세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동시에 그 내면의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죽음과 소녀>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두드러지며, 특히 두 인물이 서로를 붙잡고 있는 모습은 사랑과 이별, 생명과 죽음이 얽혀 있는 인간의 숙명을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하여 완성한 것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와 맞물려 있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으며, 죽음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던 시대였습니다. 실레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연인과 헤어져야 했고, 이 그림은 그러한 현실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소녀>는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현실이 결합된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감정을 담아낸 깊이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색채를 들여다보면, 배경은 어둡고 음울하며 황량한 느낌을 주어,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불안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두운 색감으로 표현된 남성의 얼굴과 피부, 옷 색등은 죽음의 상징성을 더욱 부각하고 있으며, 여성의 몸은 상대적으로 밝긴 하지만 생기보다는 무력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생명이 죽음과 공존하며, 결국에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간다는 실레의 철학적 관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개인적인 사랑과 이별을 넘어,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생과 사, 애정과 상실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단순한 연인의 이별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인 불안과 사랑의 유한성을 직면하게 됩니다. 실레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가 지닌 덧없음과 동시에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감정을 극적으로 형상화했던 것입니다.
에곤 실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다행히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그의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파악하고 미술 교육을 권했습니다. 그림 영재였던 그는 최연소 나이로 빈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풍 때문에 자퇴를 합니다. 에곤 실레의 재능을 알게 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지원을 받게 되고 진보적 미술운동인 비엔나 그룹에 합류하여 활동하기도 합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이 외설적이고 도발적이라고 비판하며 자기 과시적인 면이 많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미성숙한 예술로도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표현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리기도 했습니다.
에곤 실레는 28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화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곤 실레도 그 주인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를 다룬 영화가 2016년에 상영되었습니다.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림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에곤 쉴레역을 아주 잘생긴 노아 자베드라가 맡았고 발리 노이질 역을 발레리 파흐너가 맡아 열연을 했습니다. 관객들의 평점은 남자 주인공 얼굴로 높은 점수를 준다고도 하는군요. 영화의 전개보다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에만 집중하게 되었다나요...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에곤 실레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스승 클림트는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면서, 자네가 보는 걸 나도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에
자신은 꿰뚫어 본다고 대답합니다. 궤뚤어 보면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죽음과 소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감정의 깊이를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인간이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시금 성찰하게 되지요. 결국, 실레가 남긴 이 작품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철학적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최승자의 시와 실레의 그림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소녀>에서 소녀가 죽음을 끌어안듯, 최승자의 시에서도 삶과 죽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감각이고, 사랑이고, 추락이며, 그 모든 것이 겹쳐진 연극적 장면입니다.
최승자 시인의 시와 에곤 실레의 그림은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에서 표현되었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응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삶의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다시금 되새겨 보게 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미래의 한 순간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것이지요.
최승자 시인의 언어는 언제나 한계와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가 봅니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