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사였다.
2018년 1월. 20년이 넘은 구축아파트에 높은 산 아래에 자리잡은 우리집은 여름엔 시원했지만 겨울이면 추웠다. 햇살 가득한 남향이면 좋으련만 방향 마저 동향이라 겨울이면 산에 둘러쌓여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 후 처음 살았던 아파트에서 첫째를 임신하고 곧바로 둘째를 연년생으로 낳아 잘 살았던 곳이다. 하지만 오래된 아파트는 손 볼 곳이 많다며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이사를 할 것인가 ? 기존 집을 고쳐서 살 것인가? 를 고민했다.
기존에 살던 아파트는 다양한 평형대가 있어 같은 아파트 큰 평수로 갈 것인지, 다른 아파트로 갈건지도 고민이었다. 이사를 하면 대출이야 당연히 받아야 했고 가격측면에서는 살던 아파트의 큰평수가 가격 경쟁력은 좋았지만, 2년후엔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예정이라 초등학교와 가까운 초품아로 가고 싶은 마음과 10여년을 살았던 아파트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다.
472301, 출처 Pixabay
자차가 없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엄마라 어린이집을 선택할 때도, 유치원을 입학 할 때도, 직근접위치로 선택해야 했다. 일을 언제 관둘지도 모르지만 언제고 다시 일을 해야 하기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아파트 단지에 위치)은 가까웠지만 초등학교가 가파른 언덕길로 아이들 걸음이면 1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었다.
회사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부동산에 문을 두드렸다.
'부동산 가격이 좀 올랐다던데 기존에 살던 집 매도해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지'
라는 생각으로 매수 하고 싶은 아파트의 가격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완공예정인 아파트도 몇 군데 있어 분양가에 프리미엄을 주면 매수가 가능했기에 조금 무리일지라도 신축아파트로 이사를 가보자는 마음이었다.
부동산에 들어서면 대개 첫 질문이
"현재 집은 자가에요?
융통할 수 있는 현금은 얼마나 있나요?"
호기롭게 시작했던 마음과 달리 중개인의 질문은 나의 능력을 테스트 받는 말처럼 느껴졌다. 현금 없이 매수가 어려울 것이라는 답변.
아니, 현금으로 집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중개인의 설명은 부동산 정책으로 매수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때가 안 좋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지만)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매물들도 내가 원하는 매물도 아니었고 금액도 턱없이 비쌌다.
신축아파트의 분양가는 정해져 있지만 프리미엄이라고 하는 피는 매도자가 정하는 가격으로 그 금액은 적정선이라는 게 없고 집집마다 달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 1가구 1주택자가 기존집을 처분하지 않고 분양권을 사면 양도세가 부과된다고 했다. 분양권 투자자들도 세금 문제로 작년에 이미 다 팔았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뒷북을 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1가구 1주택자. 기존집을 매도하고 매수에 대한 질문을 해봐도 매도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얼어붙은 시장에서 구축아파트는 외면 받고 있었고, 이사를 하려면 헐값에 집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양도세가 뭔지도 몰랐고, 사실 부동산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었던지라 들어도 무슨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지금 생각하면 한심했지만 그 시절 나는 그게 당연한거라 생각해 설명만 듣고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부동산 신조어 중에 브역대신평초라는 말이 있다.
브랜드,역세권,대단지,신축,평지,초품아 6가지를 기준으로 아파트 청약을 할때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처음 이 단어를 알았을 때 충격이었다. 신혼초 이사 할 집을 많이 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대출금이 무서워(그때는 금리도 저렴했고 대출도 많이 해줄 때였는데) 감당할 정도라 생각해 선택한 집이 6가지 조건중에서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는 아파트였으니 말이다. 신혼집을 구할때도 부동산 책 한 권 읽지 않은 채 속된 말로 집만 구경하고 다녔다.
그 당시 열심히 매물을 보러 다녔던
신축 아파트 후보지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면
신축 아파트 후보 1
:장점 역세권에 평지로 생활권이 좋다.
:단점 초등학교 위치가 애매하다. 신호등을 여러번 건너야 한다. 프리미엄 가격이 비싼 편이다
신축 아파트 후보 2
:장점 초품아로 아파트 입구에서 2~3분 거리다.
:단점 평지가 아니고 버스도 마을버스만 다닌다. (지금은 일반버스도 한대 추가되어 운영중)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나오기도 했다.
신축 아파트 후보3
:장점 평지, 초품아는 아니지만 초등학교가 가까운 위치에 있다. 대형마트가 5분 거리에 있다.
:단점 기존에 살던 동네가 아닌 옆동네라 낯선환경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프리미엄 가격이 비싼 편이다.
모든 조건이 충족한 아파트는 이미 넘사벽이라 그 중에서 몇가지만 골라야 했다. 역,신,평,초를 기준으로 여러군데 부동산에 발품을 찾으러 다녔다. 위치가 좋으면 학교가 멀고, 초품아는 평지가 아니고... 그렇지만 나는 세 곳 중에서 한 곳이라도 이사를 가고 싶었다. 왜? 신축이니까!
신축 후보 2번은 위치가 좋지 않다보니 나중에는 마이너스 피로도 거래를 한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남편이 '그 아파트 문제 있는 거 아니냐?' 고 하면서 더 가기 싫다고 차라리 이사를 안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내가 열심히 쳐다 봤던 신축 아파트들은 하나 둘 씩 완공이 되어 입주가 시작된다는 현수막을 봤지만, 그 곳에 우리집은 없었다.
몇달 돌아다녀보니 우리집만 빼고 다른 아파트 가격이 전반적으로 비싼편이었다. 우리동네를 벗어나 옆동네도 가봤다. 비싼건 옆동네도 마찬가지. 가고 싶은 곳은 이미 비쌌다. 다닐수록 듣는 이야기는 뻔했고(지금 안팔린다,이미 오른건 안 떨어진다 등등) 부동산에 대해 알아 갈수록 점점 허탈감만 밀려왔다. 점점 이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보 2번이었던 신축 아파트도 이후 상승세에 엄청 올랐지만 위치적인 게 컸던 탓인지 남편은 그 아파트에 이사가지 않은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신축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12월 건강검진으로 셋째를 임신한 걸 알게 되었다.
두명의 손을 잡고 다니는데 손 잡아줄 아이가 한명이 더 생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루 이틀...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 해 가을 벌초를 가서 친척들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육아고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년생을 키워 이쁜 둘째의 어린시절을 많이 못보고 지나쳐 마음이 쓰인다고.
남편과 농담으로 셋째 임신하면 낳을까? 농담처럼 이야기한다는..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노산이라 원한다고 생기지 않을거라고 말을 흐리고 말았는데 (이래서 함부로 말 꺼내면 안되는 거구나..)
그리고 어쩜 돌아가신 부모님들께서 보낸 선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셋째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같은 아이라고 마음을 바꿨다.
그리하여 복을 주는 다복 이라 태명을 지었다.
넷에서 다섯이 된 우리 가족
2019년 7월 막둥이가 태어났지만 이사를 못한 우리집은 정말이지... 너무 좁아서 물건을 다 버리고 싶었다. 쇼파를 버릴까 하다가 버리는 것도 돈이라며 포기. 짐을 덜어내도 또 다른 짐이 들어왔다.
셋째 장난감까지 더해져 물건들에 치이고 밟히는 게 일상이었다. 내년에는 초등학생이 되는 첫째의 책상도 사줘야 했다. 막둥이 100일 후 아이를 데리고 다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부동산이 조금씩 바빠 보였고, 근처 아파트 초품아 대단지 아파트에 매물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이상해서 가까운 부동산에 문의하니 지금 전국에서 투자자들이 몰려 오고 있다고 했다. 한달 사이에 집값이 많이 올라 있었다. 오르는 게 순식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이라도 매수 해야 될거 같아 남편에게 이사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단지에 초품아 아파트는 평형대비 비싸고, 우리 다섯식구가 살기엔 좁을거 같다는 게 남편의 의견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또 기회를 놓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또 한번의 기회가 지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제일 쌌던 매매가격이었는데... 매물중에 한 곳만 매수했더라면, 내가 봤던 무수히 많은 매물들은 우리집 빼고 다 올랐으니 말이다. 남들은 쉽게만 하는 이사가 나에게만 이렇게 힘든 건지 모든것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넋 놓고 있는 사이 누군가는 우리동네를 사재기 하고 있었다.
실거주자도 아니면서!
왜?
실수요자는 나인데
투자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세상이라니
...
그때까지도 나는 자본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신혼때 남편과 첫 집을 알아보러 다니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우리에게는
부동산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어른이 없었느냐고...
치열하게 살아오신 부모님들이시지만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거 같다.
엄마는 대출로 집을 매수하는 것도
안된다고 하신 분이셨다.
빚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빚부터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무지였음을.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여러번의 일을 겪은 뒤에야 깨달았다.
그 사실이 너무 화가 났고 내가 놓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때부터 부동산 관련 뉴스를 찾아보고 경제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부동산 카페, 부동산 블로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부동산의 정책, 흐름, 금리의 영향이나 미국경제의 동향까지 여러 가지의 변수를 알고 있어야 했다.
몇 년동안 집을 알아보러 다녔으면서도 왜 부동산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부동산은 투기꾼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세계는 내가 발 들이는 게 아닌 나와는 먼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몰랐던 나를 원망하기보다 세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거문제는 삶의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걸 깨달은 순간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관심 있어 하는 에세이나 심리학 관련 책들만 간간히 읽은 정도였다. 그것도 읽었다고 할수 없는... 목차에서 몇구절씩만 보는 정도였다.
그렇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몇권 읽어보니 중구난방으로 집을 볼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정해야 했다.
이사에 있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말고 세가지 정도만 정해서 집중적으로 알아봤다.
매물 알람을 등록하고 원하는 집만 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1층의 40평대의 초품아 아파트로 조건을 정했다.
조건을 변경하니 한동안은 1층 매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히 보이는 40평대 1층 매물들은 다 보러다녔다.
그렇게 눈이 빠지게 매물을 보던 중 지금의 집이 매물로 나왔고, 전세입자가 거주중이었는데 전세일자 만료로 곧 이사예정이라고 했다. 이사가기 전에 집을 보고 싶었지만 약속된 시간에만 집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남편을 설득해 이사간 다음날 집을 보러 갔다. 비어 있던 집을 첫 손님으로 보고난 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남편을 설득해 이사에 성공 했다.
그렇게 재작년 24평에서 43평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들에겐 평범한 이사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이사였고, 이사를 준비 하면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영향도 컸다. 둘에서 셋이 되고 나니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대로 살다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거 같아 시작하게 된 공부로 아이들에게 어떠한 선택이 조금더 나은지, 수많은 선택의 연속에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이사였지만 이사를 계기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으며 쓰는 기쁨을 알게 되어 필사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캘리그라피를 배우게 해줬다.
현재 내 모습이 출발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시작이라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쳇바퀴돌던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도전해보고 한걸음 내딛었다고 말하고 싶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의 후회로
이제는 과거의 머물러 있기 보다
내일 성장을 꿈꾼다.
변화를 시작한 나.
그런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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