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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하는 지니작가 Mar 09. 2023

애도의 글쓰기_내 마음속의 방패

 [7인7색이야기 3월]


2017년 2월.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

명절에 무리를 한 탓인지 몸이 많이 아프다고 하셨다.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는 엄마를 잘 알기에 병원을 다녀오지 않으셨다는 말에 잔소리하며 병원에 꼭 다녀오라고 했는데, 딸에 잔소리가 듣기 싫은지 알겠다고 한 숨을 쉬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날 저녁,

저녁준비중인데 막내이모가 전화가 와서 엄마가 많이 아파해서 동네 종합병원에 갔더니 게실염이 있다고 해서 방금 입원을 했다고 알려주셨다.

당뇨도 있으셨고 지난달에 있었던 설날에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고 음식을 하신 탓인가? 걱정을 하며 아이들 저녁을 먹였다.


게실염?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대장의 벽에 생긴 게실 내에 장의 내용물이 고여 발생하는 염증)

밥을 먹으려다가 인터넷으로 병에 대해 검색을 해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 주는 불안감인지 밥을 먹으려는데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남편은 불안한 나의 감정을 눈치채고 엄마가 계신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밤 9시쯤이었던 거 같다.

그때는 그래도 면회가 되어 저녁이 지난 시간에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배가 아파서 거동이 불편해보였다. 담당의사가 조금 전에 퇴근을 했다고 하면서 내일 병원에 오면 면담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여러가지 검사를 해보니 엄마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이야기였다.

당뇨를 20여년 앓고 계셨고,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수치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게실염이 오면서 심장에도 영향이 있어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어머니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어머니의 몸 상태는 얼음위에 있는 상태입니다.

조금만 금이 가도 와르륵 무너질 수있고 이런 말을 드리긴 조심스럽지만

내일 당장 돌아가신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입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의사가 겁을 주는거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면 상태가 조금만 나빠도 최악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거라고.

엄마는 겉보기엔 환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운 피부의 하얀얼굴로 환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픈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작지만 강인한 엄마라 나는 의사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지 않았다.

조금 아픈 걸 겁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머리를 후려치듯이, 의사는 나에게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했던거 같은데 그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라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매일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전 시간에 의사와 면담하면서 엄마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이 듣고 싶어

엄마의 상태를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엄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신장의 수치가 너무 나빠져서 투석을 해야된다고 했다. 투석을 하니 몸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몸이 차가워지고 추워서 따뜻한 핫팩을 해도 따뜻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님을 먼저 보낸 경험이 있는 남편은 엄마를 동네 종합병원이 아니라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극구 반대를 하면서 다른 병원에는 절대로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병문안을 온 어느날

중환자실에 담당의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이야기를 해야 될거 같다고 하면서

종이를 꺼내며

어머니에게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며

연명의료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설명을 들으면서 의사선생님 앞에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연명의료

환자가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죽음에 이르는 기간만 연장하기 위해서 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말한다. 연명의료 유보는 임종 단계의 처음부터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 것을, 중단은 시행하고 있던 연명의료를 그만두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2월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명의료 (한경 경제용어사전)



의사 선생님께 대학병원을 옮기겠다고 말씀 드리니

병원을 옮기신다고 해도 연명의료는 잘 생각해보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


대학병원으로 옮긴 후 게실염 수술을 진행했고 처음수술은 잘 되었다고 수술 담당의사가 설명했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가 세번은 더 있다고 했다.


두번째 수술이 진행되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솔직히 어떤 수술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의사가 말한 세번의 고비는 수술을 의미한거라고 친정오빠가 설명 해줬다.


수술이 끝난 그 밤.

새벽1시쯤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엄마가 패혈증이 와서 의식이 없다고 했다.

다급하게 병원에 가서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의식이 없는 엄마에게 옛날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다시 의식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3월 9일 아침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향년 71세. 6년전 오늘.

엄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성인이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지하고 살아온 삶.

그렇게 어른아이는 엄마와 생애 이별을 했다.

발인날 햇살이 좋고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슬펐지만 따뜻한 날씨를 보며 엄마는 천국에서 편안하신가보다

이제는 엄마를 보내드려야 되는게 맞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내 나이 38살.

남편도 있고 아들,딸이 있는 엄마였지만

나는 고아가 된 기분이었고 한 없이 슬펐다.

어릴 적 엄마가 눈 앞에 없으면 그렇게 울어대던 울보...혼자 떠난 엄마가 나를 두고 간 것이 슬펐고, 이제 다시 볼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나를 지켜주는 엄마.방패와 같은 존재 엄마.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

나는 한동안 3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울고 있는 내가 싫어 눈물이 말랐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지금은 맛있는 밥도 챙겨 드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지만 엄마가 살아계실 때,

엄마에게 늘 맛있는 밥상을 받기만 했던 못난 딸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챙겨드리지 못한..

후회에 눈물을 흘린다.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커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는 딸이었다는 사실에 종종 화가 나기도 했던 지난 시간.

우리는 그렇게 소중한 가족이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된다.





살아 생전 나의 방패가 되어준 엄마.

이제는 나의 마음속에 방패로 자리잡아 내가 힘들 때 책을 읽게 해주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게 해주신다.

6년에 시간이 흐른 탓인지 작년보다 올해는 많이 울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속 방패들이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다.



잘되가고 있는 딸을 보는 엄마의 따뜻한 미소가 느껴진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하게 된 첫 이사.


좋은 집으로 이사간 딸을 얼마나 기쁘게 바라보셨을까?


비록 살아계실 때 더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지만 엄마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잡아


든든히 지켜주는 방패로 남아계신다.


방패였던 엄마의 딸은


이제 잘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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