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러시아어 동사 гулять(굴럇).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보통 러시아어 교재에서는 '산책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래는 국어사전에서 '산책하다'를 찾은 결과이다.
* 산책하다: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다.
아기자기한 산속 오솔길이나 동네 한 바퀴가 연상된다.
그러나 실제 '굴럇'은 편안한 들숨날숨에 피톤치드나 한가로이 들이키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 사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사례 1. 굴럇이나 좀 하고 집에 갈까?
* 내 기억의 첫 굴럇이다. 당연히 '굴럇'을 '산책하다'로 잘못 인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제 막 친해지고 있던 러시아 친구들 다샤와 마샤.
모스크바 아에라포르트(Аэропорт)역 근처에서 함께 일정을 마쳤고, 곧 헤어질 참이었다.
겨울이라 머리카락에는 눈이 붙어댔고 코 끝은 발갰다.
지하철역 입구 근처에서 다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다샤: 우리 굴럇이나 좀 하고 집에 갈까?
마샤: 오, 그러자. 왠지 바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네.
해일: (날씨도 별로 안 춥고 배도 부르고 살짝 걸으면 딱 좋겠다) 좋지.
지하철역에서 한참 벗어날 때까지도 몰랐다.
그대로 1시간 반 넘게 8km를 걸어 붉은 광장에 도달하게 될 줄은.
사례 2. 식사하기 전에 잠깐 동네에서 굴럇하다 오자.
부모님 댁에서 독립한 이고르가 아르쬼과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간단히 스시*를 포장해서 집에서 먹기로 했다.
*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쓸 내용이 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스시와는 많이 다르다.
곧 차가운 스시, 따끈한 스시를 들고 집에 당도했다.
이고르: 식사하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한데, 짐 내려놓고 잠깐 동네에서 굴럇하다 오자.
아르쬼: 그래, 새 동네는 어떤지 구경시켜줘.
해 일: (동네 정도면 최소 30분이군) 출발!
동네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가면 가는 거고' 정신으로 개복치처럼 살아와서 얼마나 걷든 불만이랄 것도 없고, 당시 굴럇에 적응될 대로 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네'의 범위에 숲과 지푸라기 늪과 개울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예상밖이었다.
행군을 마친 우리는 돌아와서 스시를 맛있게 먹었다.
'굴럇'은 다양한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굴럇하자는 말에 모스크바를 남북 횡단했고,
굴럇하던 길에 마주친 빽빽한 나무들을 뚫고 가다 너덜너덜해졌고,
굴럇하다 막차를 놓쳐 24시간 맥도날드에서 옹기종기 첫차를 기다렸다.
확실히 산뜻한 '산책'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러시아어에서는 굴럇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1. 노동이 아닌 목적(휴식이나 즐거움)으로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2. 이리저리 움직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다.
3. 일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다(잠깐 휴식이 아니라, 나흘이나 일주일과 같이 큰 스케일로)
4. 사용하지 않는 상태(기계나 농경지)
5. 즐겁고 떠들썩하게 놀다.
...
* 위키 단어장 내용 일부 발취.
* 고양이가 짝을 찾기 위해 앵앵 울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상황에서도 굴럇을 쓴다.
언뜻 봐도 '굴럇'이 '산책'보다는 다각도로 잘 놀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는 '굴럇=산책하다'라는 잘못된 개념으로 인한 추가 희생자 발생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굴럇'은 '굴럇'이기 때문이다.
* '산책'을 한자 그대로 풀이해서 '생각 흩어놓기'로만 본다면 어느 정도 통할수도 있겠다.
* '굴럇'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를 찾아내고야 말겠다.
гулять[굴럇] : 굴럇하다.
Давай погуляем![다바이 빠굴랴옘] : 굴럇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