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아홉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마흔넷. 둘 다 초혼이었지만 나이로 치자면 많이 늦은 결혼이었다.
그래서인지 집안에서는 크게 반겼다.
나 스스로는 결혼에 큰 기대도 이유도 없었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려 며늘아기가 되었다. 그것도 너무 늦은 며느라기가.
시어머니는 참 강한 분이셨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홀로 아이들을 키우셨고, 알코올에 의지하던 시아버지와 시댁 식구들까지 돌보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하셨다.
그럼에도 언제나 단정하고, 선이 굵은 얼굴에 시원한 말투를 지니신 분이었다.
나로서는 늘 어렵고 낯설었다.
집 아래 살던 시누이와 조카까지 더해져, 나는 자꾸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어리석고 서툴렀다.
어머니가 주말에 함께 밥을 먹자고 하셔도 남편이 거절하면 그냥 두었다.
진지를 차려 드리는 것도 아니고 밥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를 하는 것쯤은 당연할 일일텐데 그때는 다 싫었다.
그때의 나는 좁은 설거지통보다 더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혼자 밥 먹는 게 싫다”던 어머니의 말씀도 흘려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면 어디서든 먼저 인사를 건네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줄 아시는 분이셨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나가면, 사람들이 내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글라라(어머니 세례명)가 며느리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박사 며느리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좋은 데도 데려다준다면서요?”
정작 내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신 적 없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자랑하고 다니셨다.
나만큼이나 무뚝뚝한 분이셨는데, 외출길에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돌아가시기 전, 친정엄마와 통화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조금만 더 살고 싶어요. 손녀 크는 걸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내가 선물했던 옷과 장갑, 모자를 만났다.
받으실 때는 특별한 내색도 없으셨는데, 곱게 접어두고 소중히 간직해 놓으셨다는 것도.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전 표현은 서툴렀지만, 그 속에 정이 담겨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시누이가 생전 어머니 댁에 산다.
여전히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시누이 얼굴과 몸짓에서 가끔 어머니가 보인다.
그럴 때마다 불현듯 그리움이 밀려온다.
시가가 싫어 ‘시자의 시금치도 싫다’는 말이 있다. 아니다.
그 말은 틀렸다.
돌아가시고 나면 모든 게 그립다.
그 소박한 시금치 무침처럼, 어머니는 내 삶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맛과 마음을 남기셨다.
그래서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