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찬통 속에 담긴 시간과 마음에 관하여 -
연애 시절, 남자친구의 가방에서 투명한 반찬통들이 주섬주섬 나오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깻잎무침, 배추김치, 꽈리고추무침.
뚜껑을 열 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어떤 온기였다.
"엄마가 네 것도 챙기셨어."
그가 건넨 말은 무심했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일상이 묻어 있었다.
아들을 챙기는 어머니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예비 며느리까지 포함된 손길.
나는 그때 그것을 ‘호의’라고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운이 좋다’고 여겼다.
특히 꽈리고추무침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꼭지를 하나하나 정성껏 떼어내고, 간장과 깨소금을 버무린 그 맛.
친정엄마의 음식이 늘 짠맛이 먼저였다면, 시어머니의 손맛은 담백하면서도 깊었다.
첫 술을 뜰 때마다 '아, 이런 게 정성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결혼하면 편하겠다.’
얄팍한 계산이었다.
결혼 후에도 반찬통은 계속 왔다.
일주일에 한 번, 때로는 며칠에 한 번씩, 시어머니는 반찬을 보내셨다.
멸치볶음, 깻잎무침, 된장찌개, 심지어 손이 많이 가는 장조림까지.
"입맛 없을 땐 조금씩이라도 먹어라."
짧은 메모와 함께 건네받는 반찬통은 나에겐 그저 ‘편리함’이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가득 찬 반찬통들을 보면서도, 나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고맙긴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노동인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스며들어 있는지는 몰랐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받아왔고, 당연하게 비웠다.
남편은 가끔 말했다.
"엄마가 원래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셔. 부담 갖지 마."
그 말이 나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
부담을 갖지 않았다. 아니, 부담을 느낄 줄 몰랐던 것이다.
첫 명절이 왔다.
평소에는 모든 걸 도맡으시던 시어머니였지만, 명절만큼은 달랐다.
며느리의 손길이 필요했다.
낯선 부엌에서 칼을 쥔 나는 왼손잡이라 더욱 서툴렀다.
도마 위의 무는 들쭉날쭉하게 잘렸고, 파는 비스듬히 썰어졌다.
그때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시누이의 남편은 태연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사위는 저렇게 앉아 있고, 며느리는 이렇게 칼을 쥐어야 하는구나.’
씁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다는 것을.
시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홀로 해왔다는 것을.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시어머니의 손을 제대로 보았다.
굳은살이 박힌 손, 세월의 주름이 새겨진 손.
그 손으로 얼마나 많은 꽈리고추 꼭지를 떼어냈을까.
얼마나 많은 깻잎을 한 장 한 장 씻어냈을까.
명절이 끝날 무렵, 내가 정성껏 사온 과일과 고기를 보시던 시어머니가 시누이에게 건네셨다.
"많다, 많아. 이걸 다 어디다 써. 네가 좀 가져가라."
그 순간 마음이 서늘했다.
'내가 사온 건데...' 하는 서운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아들은 아들이고,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라는 온도 차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것은 시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음식 솜씨는 없으면서 손만 컸던 내가, 마음만 앞섰던 내가, 괜히 찔려 서운해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 서툰 모습을 다 보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없이, 묵묵히, 반찬통을 채워 보내셨다.
그 안에는 아들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서툰 며느리를 향한 기다림과 믿음도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도 이제 부엌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꽈리고추 꼭지를 따는 것도, 깻잎을 무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그 맛은 여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를 따라 해도, 어딘가 다르다.
그때야 알았다.
음식의 맛은 손맛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온도라는 것을.
시어머니가 반찬을 만드실 때, 그 손길에는
단순히 '맛있게 해야지'가 아니라,
'잘 먹고 건강했으면'이라는 기도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시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더 이상 반찬통이 오지 않는다.
냉장고는 늘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찬은 있지만, 그 마음이 없다.
생전에 시어머니께 제대로 해드린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반찬을 받기만 했지, 정성껏 해드린 적이 있었던가.
"어머니, 제가 해드릴 차례였는데..."
후회는 늘 늦게 온다.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된다.'
시어머니의 반찬통 안에는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말없이 흘려보낸 정성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 이제야 압니다.
그 반찬통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반찬을 무칠 때마다,
나는 문득 시어머니를 떠올린다.
지금은 반찬통이 비워졌지만,
그 안에 담겼던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시어머니가 내게 남기신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