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문(非文)
센터가 문을 닫기까지 한 달이 남았다.
서윤은 그 한 달 동안 이력서를 넣었다. 사설 어학원, 다문화센터, 온라인 강의 플랫폼. 하지만 답은 거의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다음 기회에"라는 정중한 거절이었다.
서윤은 수업이 끝난 후, 책상에 앉아 전남편을 페이스북에서 검색해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무색하게 검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남편의 페이스북에서 민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10살이 된 민우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다. 웃을 때 드러나는 앞니 사이의 빈틈이 귀여웠다.
아이는 야구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옆에는 새엄마가 있었다.
"Our champion won the game! So proud of Minwoo!"
새엄마가 쓴 글이었다. 서윤은 'Minwoo'라는 표기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민우가 아니라 Minwoo. 같은 이름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댓글들을 읽어봤다.
"He's so cute!" "Great job, Minwoo!" "Such a happy family!"
모두 영어 댓글들이었다. 민우의 세계에서 한국어는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서윤은 댓글을 달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잘했어, 민우야"? 아니면 "Great job, Minwoo"? 어떤 언어로 써야 할지, 어떤 자격으로 써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7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도 아이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의 엄마였다.
"서윤아, 엄마야, 잘 지내니?"
"응. 엄마는?"
"그냥 그래. 별일 없어."
짧은 대화. 서로 묻고 답하지만,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대화였다.
서윤은 자신의 이혼을 창피해하는 엄마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았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엄마에게 민우 이야기며 한국어 수업이야기를 하며 위로받고 싶어졌다.
"엄마, 나 요즘 힘들어."
서윤의 엄마는 잠시 침묵했다.
"…왜?"
"센터가 문 닫아. 일자리 없어졌어."
"그럼 다른 데 알아봐야지."
"알아보고 있어. 근데 잘 안 돼."
"그러게 돈도 안되는 일을 왜 그리 붙잡고 있어. 너 요즘 병원에 다니기는 하는거야?”
서윤은 한숨을 삼켰다.
"엄마, 나… 민우 보고 싶어."
어머니는 또 침묵했다. 이번엔 길었다.
"서윤아."
"응."
"그 애는 이미 거기서 잘 살고 있어. 네가 흔들면 안 돼."
"나 흔드는 거 아니야. 그냥… 보고 싶다는 거야."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단호했다.
"엄마는 항상 그래.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해."
"감정으로 살 수 없어, 서윤아. 네가 그렇게 살다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
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또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서윤아, 나도 네가 힘든 거 알아. 근데 그렇게 청승떤다고 누가 알아주니? 빨리 정신차리고 너는 너대로 살아야지.”
이번에는 서윤이 길게 침묵했다.
"그냥 버텨. 시간 지나면 나아져.”
서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엄마, 그만 끊을게요. 나중에 통화해요." 그녀는 황급히 종료버튼을 눌렀다.
참아내던 마음 끝에서, 두 눈에 눈물이 조용히 번졌다.
서윤은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시간 2분 43초. 짧은 대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대화. 그녀는 핸드폰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외국인노동자센터 폐쇄 공고가 붙었다. 시 예산 삭감으로 다음 달부터 운영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윤은 학생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이 될 것 같습니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하산이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한국어를 배워요?"
"다른 기관을 찾아보시거나... 아니면 독학으로..."
서윤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수업이 끝난 후 서윤은 빈 교실에서 짐을 정리했다. 3년간 써온 이 교실과의 이별이었다.
마지막 수업 날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왔다. 모두 아쉬워 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에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몇몇은 눈물을 글썽인다. 서윤도 마찬가지였다. 하산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희가 편지 하나 준비했어요."
서윤은 편지를 받아들었다. 서툰 한국어로 쓰여 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한국말을 잘 배웠어요."
마지막 문장에서 눈물이 난다. 내가 그들에게 정말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친 것일까.
"하산 씨, 저야말로 고마워요. 많이 배웠어요."
"선생님, 앞으로 뭐 하세요?"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선생님, 괜찮을 거예요.“
하산이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그런데 그의 '괜찮을 거예요'는 서윤이 늘 하던 '괜찮아요'와 달랐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이상한 문장이었다. 문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서윤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나간다. 마지막 인사들, 연락처 교환, 약속들. 모두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특별하게 느껴졌다.
모든 학생들이 떠난 후, 서윤은 혼자 교실에 남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윤은 칠판에 분필로 썼다.
나는 괜찮지 않아요. 나는 괜찮지 않았어요. 나는 괜찮지 않을 거예요.
이 문장들은 문법적으로는 정확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하지만 서윤은 또 다른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괜찮지 않지만, 살아갈 거예요.
이 문장은 복잡했다. 현재의 부정과 미래의 의지가 함께 있었다. 문법적으로는 어색할지 모르지만, 가장 진실한 문장 같았다.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서윤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문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려고 했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삶. 하지만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삶은 비문투성이였다. 시제가 뒤섞이고, 주어가 모호하고,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 그런 삶.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인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진실하고, 어긋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서윤은 칠판 마지막 줄에 썼다.
"삶이 문법이라면, 나는 늘 비문으로 살았다. 하지만 어쩌면, 비문이 더 인간다운 문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필을 내려놓았다.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서윤은 가방을 챙기며 빈 교실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여기서 그녀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문법이 틀려도 마음은 전해진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비문이 정문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
서윤은 교실 문을 닫으며 뒤돌아봤다. 칠판의 글씨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일이면 누군가 그것들을 지울 것이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담고 있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서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 갠 하늘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