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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주 Jul 14. 2024

금요일에 헤어져서 다행이야.

 그는 일주일 전에 미리 예매한 영화를 볼 수 없다며 급작스럽게 약속을 변경했다. 순간 촉이 왔다, 느낌이 왔다. 그 말을 하겠구나라고. 늦어진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헷갈리고 알 수 없었던 상대방의 마음을 이렇게나 확신할 수 있었던 때도 잘 없었으니깐. 그 마음이 나와 헤어지겠다라는 사실은 슬프지만 말이다. 벤치에 자리를 잡자 마자 그가 말했다.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십프로 만큼은 그 말이 아닐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무색해졌다. "...이유가 뭐야..?" "이건 너의 문제라기 보단, 나의 문제인데..."

 지겹다, 정말. 어디 학원이라도 가서 [속성으로 이별을 고하는 법] 따위의 클래스를 듣는 건지, 십중팔구 저렇게 운을 띄운다. 변명 혹은 진심같은 것들을 듣고 있자니 몸에 힘이 빠지면서 심박수가 평온해졌다. 이것이 최선이었냐는, 시간을 갖자는 대안을 할 수는 없었냐는 나의 물음에 이별이라는 것이 원래 한 사람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며, 즉 최선이라는 대답을 긍정했다. 본인의 문제라며 저자세로 밑밥을 깔 땐 언제고 이제 와선 단호하게 이별을 고할 수 밖에 없는 본인의 선택에 힘을 싣는다. 그래, 차라리 이 노선이 더 합리적이지. 이상하리만큼 쿨하게 이별의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조금 걸은 후 헤어지느라(?) 먹지 못한 저녁 식사도 같이 했다. 어쩐지 친구와 놀다가 집에 가는 느낌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당황스러움이 자리 잡아 상실감과 슬픔이 끼어들 새가 없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이 사고와도 같은 이별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몇 시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썰을 풀었다. 저녁은 혼자 통닭집에서 양념치킨 한마리를 먹으며 맥주도 마셨다. 30대의 실연에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자기 위로를 연신 퍼붓는 찰나에 비까지 내렸다. 집에 돌아와 유튜브로 무한도전을 보며 간식거리와 맥주 한 캔을 더 마셨다. 정신 없이 잠들고 다음 날 7시 45분에 눈을 떴다. 원치 않는 시간에 잠에서 깬다는 건 꼭 나이가 든다는 증거 같다. 이별을 실감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 아직 하루의 시간이 더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금요일에 이별해서 다행이야, 정말로.

 마무리지을 일이 있어 차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커피와 욕심부려 산 스콘 2개를 다 먹고 일을 끝냈다. 오늘은 맥주 대신 헬스장을 선택했다. 이렇게까지 스퍼트를 올려 런닝머신을 탄 적이 있던가. 30분 동안 3.25키로를 평균 페이스 9분으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뛰면서 더 생각이 정리됐다. 하루는 사장님을 놀라게 할 정도로 통닭 한 마리를 클리어하고 하루는 잔업과 운동이라니. 나름의 이별과 상처 끝에 쌓인 빅데이터가 영 쓸모 없지는 않구나, 그리고 여전히 정말 다행이다, 금요일에 이별해서.




 그 사람한테 끝까지 말하지 못한 비밀같은거 있어?

 그 사람이 사는 곳은 내가 있는 곳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 내가 있는 곳으로 선뜻 오겠다는 그를 위해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지. 처음 만나기로 한 날 하루 전, 난 미리 우리가 갈 장소들을 가봤어. 현장 답사라고 해야 하나. 무튼 첫 데이트를 조금은 완벽에 가깝게 준비하고 싶었거든. 당일 그 사람은 내가 찾은 식당에 먼저 도착했고 우린 밥을 먹었어. 그리곤 내가 짜둔 데이트 코스를 착실히 수행했지. 산책로를 걷고 미리 봐둔 카페를 갔어. 내가 준비하지 않았던 건 적당한 바람과 자연스러운 조명뿐이었어. 그 사람은 만나는 동안에도 이 사실을 몰랐고 앞으로도 계속 알지 못하겠지. 말 못한 비밀이 있다면 이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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