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고,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레이디 버드>는 나의 올해영화가 될 것 같다. 혹은 내 인생영화가 될 것만 같다. 영화를 다 본 후의 나의 첫 현실반응이였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정말로 많이 났다. 이 세상의 딸들이라면 이 영화의 아주 사소한 장면이라도 극공감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틴은 부모님이 지어 주신 크리스틴이라는 이름 대신 스스로에게 자발적으로 지어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길 원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라왔으며 또 사는 동네인 '새크라멘토'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곳이라고 자부한다. 크리스틴은 하루 빨리 그 곳에서 탈출하길 원한다. 새크라멘토라는 공간을 포함하여, 가족들에게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서. 이상 영화 <레이디 버드>의 줄거리였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10대를 보내지 않았나 싶다. 얼른 자발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모든 것들을 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고향과 집과 가족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모두들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집안 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틴은 주립대를 고집한다.
나는 10대인 크리스틴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칠 때 그녀를 둘러싼 또 하나의 커다란 존재인 엄마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그것은 아마 나도 그러한 시절을 거쳐 20대 중후반을 살아오고 있는 딸이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틴은 우리 모두처럼 사춘기 시절의 성장통을 크게 하고 꿈에 그리던 뉴욕에서 20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그 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에게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누구의 강요나 억압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고 이름 지어준 것처럼 스스로를 크리스틴이라고 칭하고 소개하였다.
그렇게 싫었던 가톨릭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뉴욕에서 마음을 기댈 곳을 목적으로 성당을 찾는다. 그리곤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하던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곤 나지막하지만 엄마에게 진심을 털어놓는다. 사실은 새크라멘토 곳곳들이 좋았고 지금 또 그립다고. 엄마 또한 그런 감성을 느꼈을까? 라고 물어본다. 사실 우린 엄마의 기분을 먼저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참, 그렇게 또 지나고 나서야 떠나오고 나서야 나를 만들었던 공간, 시간,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 엄마와 자식, 엄마와 딸, 끊을 수 없는 질기고 질긴 애증의 관계는 지나고 나서야 이해 혹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화해로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어찌 보면 우리가 모두 겪었던 성장통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건 흑역사와 추억을 구분짓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레이디버드에게서, 크리스틴에게서 우리를 보게 함 때문이다.
20대의 크리스틴도 우리 모두처럼 후회로 가득한 숙취의 밤을 보낸다. 크리스틴은 술로 응급실까지 실려간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뉴욕생활이지만 그도 완벽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 아직 도약중이니깐. 크리스틴 말대로 What if this is the best version? 이란 물음 앞에서 긍정이래도 상관 없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