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고집 혹은 행복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소설 ‘운명’을 읽었다.
그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4살의 나이로 나치 정권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2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부헨발트로 그리고 차이츠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렇게 지옥같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2년동안 작가가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을 담고 있다.
나 또한 위에서 지옥같고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표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강제 수용소를 떠올렸을 때 유사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소설 속 작가는 달랐다. 14살의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수용소로 끌려갔던 기차에서부터 그가 봤던 사람들을 철저히 그의 시선을 통해서만 서술했다.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말이다. 때때로 독일 군인들은 그의 눈을 통해 호감형으로 그려지기도 했으며 이러한 서술은 실제로 그의 책이 출간되기까지 많은 반대의 이유로 작용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표현의 의도는 그가 최종적으로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명확하게 기존의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서의 삶을 그린 책들과 차별화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종종 ‘고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수용소의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어떤 고집, 최소한의 신념을 지키려는 고집,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꼭 해야 하는 작은 루틴같은 고집 등.. 작고 사소한 일상은 죄수라고 분류되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도 유효한 것으로 작가는 간주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삶은 지루함과 이상한 기다림이라고 했다. 2년 동안 반복되는 지루함과 전쟁이 끝나기만을 혹은 다른 일이 부여되기를 기다리는 삶을 작가는 견뎌냈고 버텨냈다.
살아남기 위해, 나치 군인들에게 밉보이지 않게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그저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했다. 운명론적이거나 자조적인 태도가 절대 아니다. 최소한의 신념과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그가 택했던 방법이다. 파도처럼 운명은 밀려온 것이 아니라 그 역시 그 길을 함께 걸어내고 거기서도 행복같은 것을 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차이츠에서는, 나의 경우에는 마치 멈춰진 기차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앞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변화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이제 최소한 내가 그 길을 모두 지나왔고 길 위에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실하게 임하려 노력했다는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2.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일을 겸허하게 몇 번이고 상상하곤 했다. 어떤 특별하고 완벽한 활기찬 하루를 상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빠른 기상, 학교, 두려움, 맛 없는 점심 등과 같은 고달픈 날들만 상상되곤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흘려보내고 거부하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많은 가능성들을 이 곳 강제 수용소에서 말하자면 가장 완벽하게 모두 복원해 내곤 했다.
3.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 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은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냈다.
4.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5.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 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안다.
6. 가스실 굴 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 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 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