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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주 Aug 15. 2023

64년을 함께한 부부 사이.

 “자기는 억시 우겨싸.” 연휴를 맞이 해 부모님과 근교 드라이브를 가는 길에 엄마가 아빠에게 건넨 말이다. 속으로 ‘맞아, 아빠는 가끔 너무 우겨’라고 엄마의 말에 동의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말해봤자 아빠만 더 무안할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속에 있는 말을 하는 엄마의 마음은 뭘까. 그리고 못난 자존심을 엉기라도 하듯 박박 우겨대는 아빠의 마음은 뭘까. 37년을 붙어 동거동락한 부부간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까 싶다가도 수십년의 세월을 같이 보낸 그들 또한 모를 요상한 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엔 시골에 계신 할머니댁을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암 진단을 받았지만 연로하신 탓에 별 다른 항암치료나 투병 없이 집에서 그저 진통제로만 고통을 견뎌 내신다. 그런 할아버지 곁을 애지중지 지키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따금씩 밀려오는 고통에 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하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와 나 또한 어쩔 줄 몰라 숨을 죽일뿐이었다. 할머니는 옆에서 “냅둬, 혼자 해야지.”라며 건조하고 단호하게 말씀 하셨다. 그리곤 부엌으로 가셔서 할아버지가 드실 밥을 묵묵히 지으셨다. 할머니는 입맛이 없는 할아버지를 위해 매 끼 색다른 반찬, 직접 삶은 국수, 팥 등 온갖 진수성찬을 정성껏 차려 매번 상에 올리신다. 이 또한 요상한 정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께서는 곧 제삿날이 다가온다며 당신은 한번도 제사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다른 가정집은 곧잘 생략하기도 하지만 64년간 한번도 허투루 제사를 지낸 적이 없다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말씀엔 그간 지난한 세월을 보내신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 감히 알 수 없는 부부간의 요상한 정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멀리 떨어져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64년 동안 제사를 지냈는데, 저런 몹쓸 병을 주시냐.”라고.


 할아버지는 고통이 심한 밤이면 약을 먹고 죽어버려야겠다고 울분을 토하신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그럼 나는 어쩌냐고 되묻고, 두 분은 같이 눈물을 쏟아 내시며 밤을 지새운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요즘 유일한 낙은 할아버지 본인의 산소 자리에 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님 산소 옆에 미리 납골당이 묻힐 곳과 묘비를 세워두신 할아버지. 어쩐지 그 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꼭 그 자리로 올라가 담배를 태우시며 몇 시간을 홀로 앉아 시간을 보내시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길을 늘 함께 하시는 할머니. 걸음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앞장 서 산소를 오르고, 돌담에 앉아 담배를 태우시는 할아버지 등을 바라보는 할머니. 미운정 고운정의 세월 끝에 만들어진 정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32살의 내가 당장 내일 누군가와 결혼하더라도 물리적으로 64년을 같이 보내기란 쉽지 않을꺼다. 64년이 지나면 96세이니.. 이 요상하고 기이한 형태의 정을 쌓아 살아내는 부부 앞에서 그저 겸허해질 뿐이다.


 드라이브 길에 엄마와 아빠가 나눈 대화는 매너리즘에 빠진 부부의 그저 그런 티키타카일까?

적어도 지난 주말에 내가 할머니댁에서 본 걸 생각하면 아닐꺼다. 두 분의 세월과 정은 좀 더 무겁지만 깊이 있는 것, 빛이 아닌 그림자를 함께 맞는 것, 고된 세월을 보낸 각자의 주름을 바라보는 것, 혹은 산소에 올라간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려 주는 것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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