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늙었을 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졸음이 많아져 벽난로가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에 지녔던부드러운 모습과 그
깊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기품을 사랑했고
또 그대의 미를 거짓 사랑 혹은 참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다만 한 사람만이
그대의 순례의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픈듯이 중얼거리시오,
어떻게 사랑이 머리 위에 솟은 산 위로 도망치듯 달아나
무수한 별들 사이에 그의 얼굴을 감추었는가를.
늙은 자신에 대한 상상은 좀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늙은 사람에 대한 시선이 얄팍한데도 이유가 있겠지요. 늙음에 대한 소설도 많지 않습니다. 시 또한 이미 늙은 사람에 대한 연민 혹은 사랑에 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늙었을 때, 혹은 늙은이로서 자신을 회고하는 시 혹은 소설이 왜 많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는 너무도 당연히 찾아오는 그 늙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지요. 도처에 열정과 지혜를 갖춘 시니어가 되라는 교육이 넘쳐납니다.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라하는 실질적인 조언도 널렸습니다. 분명 그런 조언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들이 정말로 늙음에 대한 수용일런지요. 진정한 포용이자 이해일런지요. 늙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늙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요.. 혹은 늙은 배우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떠할런지요.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는 단편 「곰이 산 이쪽으로 건너왔다」에서 치매에 걸린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을 묘사합니다. 아내인 피오나가 치매 증상이 심해져 요양원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피오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남성환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그랜트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산딸나무 봉제산 20250521
그는 젊을 때 여학생들과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지요. 장인 덕분에 대학에 자리잡았고요. 아내가 치매에 걸린 것을 알기에 그는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말없이 지켜보는 수밖에요. 종내에는 아내를 위해서 퇴원한 그 남자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오려고 온갖 수를 쓰기까지 하지요.
예이츠의 이 시는 바로 그 남편을 묘사하는 듯 싶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고 그리고 이제 자신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 아름다운 머리칼은 짧아졌고 평상시의 세심한 옷차림과는 달리 요양원에서 아무렇게나 입혀준 옷을 입고 있는 아내, 그래도 남편의 마음은 오직 아내에게로만 향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지요. 결혼 오십주년 기념식을 할 때 아버지는 혼례복을 입은 어머니를 보고 예쁘네 라고 감탄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빨개졌지요. 나이든 남편이 나이든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아니었을까요. 그랜트가 피오나를 사랑한 것은 함께 평생을 살아온, 바로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아서일 겁니다.
예이츠가 노래하듯 변해가는 얼굴을 사랑하고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그 일이야말로 늙음에 대한 보상이 아닐런지요.
함께 늙어가다보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힘든 일을 겪고 난 세월의 주름을 사랑하게 됩니다. 병의 질곡을 겪어온 그 허약해진 몸을 아끼게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몸과 마음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통의 흔적이 역력한 그 흰머리를 안타까이 여기게 됩니다. 때로 후회와 번민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사랑하게 되고 간혹은 목청을 돋우다가도 입을 다물게 됩니다. 뒷모습을 보면 그저 안타깝고 쓸쓸해지니까요. 그것이 늙음의 모습, 속성이 아닌지요.
소설 속 그랜트가 피오나에게 가졌던 감정이 애틋함과 수용이듯 제 아버지가 제 어머니에게 느꼈던 것도 애틋함 그리고 수용이었습니다. 늙어가는 제가 늙어가는 남편에게 느끼는 그 마음도 애틋함과 수용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