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칼릴 지브란
패배여, 나의 패배여, 나의 고독이요 초연함이여.
그대는 내게 천 번의 승리보다 더 소중하며,
세상의 모든 영광보다 내 마음에 더 귀하네.
패배여, 나의 패배여, 나의 자기 인식이요 저항이여.
그대를 통해 나는 아직 젊고 발걸음이 빠르며,
시들어가는 월계관에 갇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네.
그대 안에서 홀로 있음을 찾았으니,
외면당하고 멸시받는 기쁨을 찾았네.
패배여, 나의 패배여, 나의 빛나는 칼이요 방패여.
그대의 눈 속에서 나는 읽었네,
왕좌에 오르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이해받는 것은 평준화되는 것이고,
완전히 동화하는 것은 잘 익은 과일처럼
결국 떨어져 소비되는 것임을.
패배여, 나의 패배여, 나의 당당한 동반자여.
그대는 나의 노래와 울부짖음과 침묵을 들으리니,
오직 그대만이 내게 날갯짓 소리와,
파도로 밀어대는 바다의 재촉과,
밤에 불타오르는 산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리라.
오직 그대만이 나의 험하고 가파른 영혼을 오르노라.
패배여, 나의 패배여, 나의 죽지 않는 용기여.
그대와 나는 폭풍 속에서 함께 웃고,
우리 안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위해 함께 무덤을 파며,
의지를 가지고 태양 아래 당당히 서리니.
우리는 위험한 존재가 되리라.
The Madman: His Parables and Poems. A. A. Knopf 1918
이 시를 처음 들었을 때 웅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이 단어는 쉽게 쓰이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상황, 조건에 놓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웅혼이라는 단어는 가슴이 활짝 열려 정신이 높이 고양될 때, 즉 나의 영혼이 나 자신이라는 영역을 넘어서는 느낌이 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웅혼 자체가 혼을 웅장하게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웅혼이라는 표현은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깊은 골짜기, 격랑 이는 시냇물, 비탈길, 벼랑이 자리한 길입니다. 그 길을 눈과 귀와 코, 그리고 손과 발, 몸이 지닌 모든 감각을 사용해서 오릅니다. 온갖 감각을 탈진할 정도로 사용한 다음, 정상에 올라섰는데 시야가 거칠 것 없이 환히 트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웅혼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웅혼을 이렇게 길게 논한 것은 이 시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눈으로 접하고 읽어가면서 그 느낌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화자는 패배를 아무리 되풀이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결국은 자신을 완성합니다. '영산'이라고 하는 히말라야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하나의 영혼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세상에서 패배합니다. 패배는 무수히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으며 또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문학이 그러했고 철학이 그러했으며 과학이 그러했습니다. 어디 그런 영역에 국한되어 있을까요. 그 어느 돈벌이에서도 그러합니다. 자금, 돈은 인간의 에너지가 응축되는 대상입니다. 누구나 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특히 오늘날 더 그러합니다. 눈으로 보는 비교가 극도로 달한 지금 돈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은 에너지를 응축하지만, 영혼을 확장하지는 못합니다. 통장은 불릴 수 있어도, 영혼을 웅혼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업에서의 성공이 때로는 영혼의 가장 큰 패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더 충격적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황금을, 땀 흘리지 않고 얻어낸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대이기에 그러합니다. 제목조차 ‘패배’입니다. 패배를 일러 '나의 패배'라고 부르면서 친밀하게 여기는 동시에 그 패배가 나만의 것임을 드러내면서 그 어떤 승리보다 소중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평범한 이는 패배보다는 승리를 귀중하게 여깁니다. 승리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하고 승리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열매를 오래도록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건 곧 안주이자 타락입니다. 더 이상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화자는 승리했을 때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나태해지는지 얼마나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고독과 초연함은 승리의 동력이지만 승리할 때는 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인식하는 일과 세상의 주류에 저항하는 일 또한 승리할 때는 오지 않습니다. 승리에 젖은 이는 달콤함에 취해 자신에게서 나오는 소리만 들으려 합니다. 그러니 패배는 온갖 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변하라고 재촉하는 파도 소리,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한편으로 침묵하는 소리. 온갖 소리가 성장하도록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패배자가 하는 일이지 승리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패배는 세상에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다움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패배한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습니다. 그렇기에 패배는 나의 빛나는 칼이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념을 받아들여 마침내는 시들어버린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영혼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패배는 그 상태를 받아들이되 나다움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시선으로 보면 내버려 둠(Gelassenheit 겔라센하이트) 입니다. 겔라센하이트는 사물들을 그 자신 안에 머물게 하라는 요청입니다. 존재를 그 존재의 속성답게 내버려두라는 이 요청은 세상의 잡음이 나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오직 내 안의 소리가 들리도록 나를 나로서 있게 하는 결단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단번에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읽어가는 동안 그리고 다시 또 읽으면서 가슴은 그토록 웅장하게 요동쳤던 것입니다. 시가 말하는 패배는 끝이 아니라, 웅혼한 영혼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