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존 오도나휴
당신 삶의 아름다움이 더 뚜렷해져, 내면의 신성을 잠시라도 엿보게 되기를.
땅의 경이로움이 숨은 감옥에서 당신을 불러내어, 가능성의 들판으로 자유로이 걸어 나가게 하기를.
새벽빛이 눈을 어루만져, 매번 새로이 하루가 기적임을 보게 해주기를.
땅거미가 내릴 때마다 성스러움이 두려움과 어둠을 신성의 자락 안에 부드럽게 품어 주기를.
기억의 천사가 갈급할 때마다, 사라진 날들 속에서 새로이 선물을 꺼내 건네주기를.
그 어떤 어둠의 손길도 마음속 희망의 촛불을 끄지 못하기를.
자신 안에서 너그러움을 새로이 발견하고, 삶을 위대한 모험으로 받아들일 용기를 북돋을 수 있기를.
바깥에서 들려오는 두려움과 절망의 목소리가 당신의 마음 안에서 어떤 메아리도 일으키지 못하기를.
영혼이 지닌 깊은 부름과 지혜를 언제나 믿을 수 있기를.
당신이 행한 모든 선과 보여준 사랑, 감당해온 고통이 당신 주위를 감싸, 천 번의 축복으로 되돌아오기를.
그리고 사랑이 두드리는 날, 영혼이 새벽을 맞는 대지처럼 활짝 열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모든 빛깔이 제각각의 빛으로 물들 수 있기를.
고요와 침묵이 넉넉해 당신의 영혼 위에 내린 하나님의 입맞춤을 음미하기를 그리고 당신을 빚어냈고, 품고, 부르는 그 영원 안에서 기뻐하기를.
혼란과 불안, 공허함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기를.
당신의 삶이 조용한 봉헌의 성사가 되어, 그 주위에서 의심은 경외의 은총으로 바뀌고, 불안은 우아함을 되찾고, 주저앉은 희망은 다시 날개를 얻으며, 고통은 마침내 평화의 품 안으로 들게 되는 그 리듬을 깨워 가기를.
신성한 아름다움이 당신을 축복하기를.
John O’Donohue, from Beauty – The Invisible Embrace(2005)
시는 언어입니다. 어휘를 읽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휘들이 모여 문장을 만들고 이윽고 맥락을 만들 때 무엇을 말하는지 어리둥절해집니다.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저렇게 되기를, 하고 노래한 다음, 마지막으로 축복하기를 바란다고 끝내고 있습니다.
'축복하기를'라고 한마디로 말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길게 썼을까요?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을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불안해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 시인 자신이 깊은 어둠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소망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인이 새벽마다 저녁마다 그리고 종일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그것은 인간이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는 근본적으로 열망이 있습니다. 삶 속에는 기본적으로 행동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망하고 행동하고 변하는 것입니다. 변화란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향이 어떠하든 간에 인간은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인간은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거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마다 흔들리는 방식은 다릅니다.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머뭇거리며 길을 찾는 이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누구도 흔들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일랜드의 성직자이자 시인 존 오도나휴는 인간의 약함을 깊숙이 들여다봅니다. 하루 전체를 들여다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초월적인 존재가 함께 함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시작은 새벽입니다. 눈을 뜨는 일 자체가 축복으로 저녁 역시 그러합니다.
즉 하루 종일 어딘가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행했고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보여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쌓여 시간이 된다면, 과거가 된다면, 그 과거 안에는 내가 현재에 이르 도로 만든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드러나지 않고 쌓여 있지요.
화자는 바깥에서 위로와 축복을 갈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당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평생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초월적인 존재가 빚어냈습니다. 그 존재는 당신을 자신의 일부로서 빚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이미 당신 안에 있는 힘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당신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들을 찾아내어 각각의 색깔을 부여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삶 자체가 조용한 봉헌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결국 당신의 의심과 불안이 변하고 희망이 날개를 되찾는 삶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지요. 이 시집의 제목이 『아름다움』인 것은 바로 그래서가 아닐지요.
글 번역을 두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했지만 인공지능 번역은 제가 원어시에서 겪은 그 느낌을 도무지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번역 역시 미흡할 겁니다. 예를 들어 'anointed' 라는 단어는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말로 어떤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지요. 이 표현을 어루만진다로 옮겼습니다. 아주 자연스럽지만 무언가 사라졌습니다.
모든 시가 그렇지만 특히 영성시에서 그 고민은 깊어집니다. 시의 울림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동안 제 영혼을 구석구석 뒤져보게 됩니다. 이 울림을 옮길 능력이 충분한지. 울림은 제가 겪어온 삶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길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독자의 삶이 봉헌의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마무리했듯 저 역시 그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