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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선 Aug 05. 2024

영어를 듣는 할아버지


화곡동 볏골공원 근처에 어린이집이 있습니다. 이 어린이집 밖에는 작은 화단이 있어 오가며 눈요기를 하곤 하는데요. 봄부터 꽃을 비롯해 먹거리까지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지요. 옥수수, 토란, 천일홍, 해바라기, 오이, 선괭이눈, 참나리 등등, 꽃과 곡식이 섞여 있습니다. 매번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서일까요. 눈으로만 보아달라고, 어린이들의 자연 학습을 위한 식물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매번 눈에 띄는 식물의 종류가 달라져 정성이 담뿍 담겨있는, 아이들을 위한 마음씨가 느껴지는 화단이지요.


요즘에는 덩굴식물이 한창입니다.  어느 날 문득 기세 좋게 건물을 타고  오르고 있더군요. 어느 날 문득이라는 건 제가 그 식물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덩굴식물이 그만큼 빨리 자란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 지난주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에서 주황색 열매가 눈에 띄었습니다. 고왔지요. 아름다웠습니다. 산에서 돌아오는 중이라 내일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다시 그 여주 열매를 찾았습니다. 있었습니다만 그 열매는 변해버렸더군요. 터졌다고 할까요? 쪼그라들어 있었고 과육이 터져 속의 빨간 씨앗이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그 옆에 새파란 열매가 있기에 그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뒤로 매일 가봅니다. 혹시 익었을까 하고요. 여주가 저를 길들인 것이지요.


오늘도 그곳을 향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6시가 넘은 시각이었지요. 이 시각 볏골공원은 꽤 붐빕니다.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아주머니들 그리고 간혹 젊은이들. 걸으시는 거지요. 공원 앞길을 지나가는데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어였지요. 내용으로 보아 여행 영어는 아닌 듯했습니다. 영화 혹은 드라마의 한 장면인 듯했지요. 흰 마셔츠, 베이지색 바지를 입으신 할아버지가 걷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영어를  듣고 계셨덙 거지요. 놀라웠습니다. 당연히 제 걸음이 느려졌지요.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지요. 






오늘도 여주는 여전히 새파랬습니다. 옆에는 오이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노란 오이가 두 개, 아이들이 참 좋아할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이 오이가 노각이 되는 거 맞아하고 의아해했지요. 방향을 틀어 돌아오면서 익숙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늘 그 시각에 나와 있는 한 젊은 남성. 언젠가는 아내인듯한 여성과 함께였습니다. 그들의 옷차림은 똑같았습니다. 두 사람의 자세도 동일했지요. 폴라폴리스 잠바에 반바지 그리고 한 손에 전자담배, 그 시각이 담배를 피우는 시각인 게지요. 오늘도 그의 시선은 스마트폰에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어린이집 쪽으로 오신 거지요. 제가 앞질렀던 그곳에서부터 어린이집 까니 내내 영어를 들으면서 오신 거지요. 할아버지는 저를 지나쳐 언덕 쪽으로 가셨습니다. 볏골공원에는 여전히 운동하는 어르신들로 붐볐습니다. 


아침을 보내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 우리는 누구나 좋아하는 일, 그리고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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