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하나의 놀이라면/체리 카터 스코트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이것이 그 놀이의 규칙이다.
당신에게는 육체가 주어질 것이다.
좋든 싫든 당신은 그 육체를
이번 생 동안 갖고 다닐 것이다.
당신은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할 것이다.
수업 시간이 하루 스물네 시간인 학교에.
당신은 그 수업을 좋아할 수도 있고
쓸모없거나 어리석은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같은 수업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후에 다음 과정으로 나아갈 것이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수업은 계속되리라.
당신은 경험을 통해 배우리라.
실패는 없다.
오직 배움만이 있을 뿐
실패한 경험은 성공한 경험만큼
똑같이 중요한 과정이므로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필요한 해답은 모두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당신은 이 모든 규칙을 잊을 것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58-59
이 시는 놀랍게도 삶을 놀이로 보고 있습니다. 삶을 놀이로 보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은 극히 진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생을 단 한번뿐인 것으로 알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일단 삶을 놀이로 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한결 더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화자가 삶을 놀이로 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혼자 하는 놀이라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놀이가 어떤 승부를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놀이는 끝까지 가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성장을 모토로 합니다. 난이도가 달라지면서 더욱 성장하거나 기술을 갈고닦게 되고 그렇게 해서 어려운 단계로 넘어가고 결국에는 졸업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런 규칙이나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전은 놀이를 일정한 규칙 또는 방법에 따라 노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우리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계속 성장하면서 어떤 목적에 도달하지 않는지요?
흔히 잊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지요. 너무도 당연하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그 사실입니다. 육체가 주어진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일, 그러므로 곧 이 세상에 등록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삶을 살아갈 자격과 권리를 획득하는 겁니다.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 권리를 24시간 누립니다. 살기 위해 먹고 듣고 걷기를, 말하고, 읽고 달리기를 움직이기를 익혀나갑니다.
먹고 자고 듣고 걷고, 말하고 소통하는, 그 일들이 삶이라는 현장에 적용되는 규칙이자 방법입니다. 평생 내가 지켜갈 규칙이자 원칙. 이 규칙을 어기면 그로 인한 벌칙이 따르는. 그런 연후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배웁니다. 이 세상을, 세상엣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여기서 내가 플레이하는 방법들을. 무엇을 위해 놀아야 하는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간혹 그 놀음은 잘못되어 어긋날 때도 있습니다. 실패라고 부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실 인생학교에서 실패란 없습니다. 그 실패는 또 다른 배움을 가져오기 때문이지요. 간혹 실패한 이들이 더 큰 이로 거듭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실패했을지라도 자신의 삶에서는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많은 이가 자신은 실패로부터 배웠다고 말합니다. 삶은 철저히 실존적인 학교인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서 있는 순간이, 혹은 자리가, 기회가 쓸모없거나 어리석은 것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놓아버립니다. 지우려고 노력하고 다른 쓸모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실패했다고 느껴질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그 실패가 사실인지는 자신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실패는 필요하다고 여겨져 나에게 온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설정한 기준에 혹은 사회가 설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실패입니다. 그것이 인생에서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패로 인해 배운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필요한 교훈이고 필요한 과정이지요. 혹 실패했다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많지 않던가요. 필요한 절차를 알지 못하거나 건너뛰기에 일어나는 일. 그 방법을 배워 도전한다면 성공하는 일은 무수히 많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무수히 실패한 끝에 걷기에 성공하듯이. 아기의 기준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의 기준은 걷는 것이지요. 아기의 기준은 철저히 자기 위주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던가요. 어떤 일을 해냈을 때 그 일에 만족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기준을 자신에게 두어야 합니다. 자기 삶의 목적에 두어야 합니다.
기준을 나에게 둘 때 삶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삶의 목적은 단 하나, 배우는 것입니다. 그 배움은 내 삶을 나답게 삶으로써 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타인은 모두 나의 거울입니다. 나만의 기준으로 살고 나만의 목적으로 살기에 해답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이 누군가 살고 있는 그곳보다 온전하고 적절하며 훨씬 낫습니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목적을 갖고 오기 때문이지요. 불가에서는 이것을 '윤회'라고 할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생을 '현생'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사람은 엄연히 서양인입니다. 코칭 세계의 선구자로서 '코칭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성이지요. 그렇다면 삶을 놀이로 보는 것은 동서양에서 동일하다고 여겨집니다. 시의 세계를 항해하다 보면 알아차리는 일, 특히 삶의 태도에 관한 시각은 늘 만납니다. 진리는 어디에서나 동일합니다. 시는 삶을 말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