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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상/겨울산/황지우

by 이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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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20120202



겨울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산명상'이라는 명상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산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산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온갖 생명을 품어 안겠지요.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가겠지요. 눈비가 퍼붓고 바람이 불겠지요. 높은 산이라면 간혹 구름이 꼭대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무뿌리가 파고들 때는 아플 테고 꽃 뿌리가 파고들 때는 간지러울 테고 멧돼지가 뛸 때는 쿵쿵 울릴 테고 다람쥐가 뛰어갈 때는 노래할 테지요. 그 모든 것을 산은 견뎌냅니다.


화자는 ‘인내’라는 이 속성에 끌립니다. 특히 '겨울산'에 끌리는 것은 겨울이 춥기 때문입니다. 산은 겨울을 비껴갈 도리가 없습니다. 산이기 때문이지요. 온 존재가 땅 위로 올라와 있는 말 그대로 볼록한 존재, 자신보다 큰 존재가 없어 온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피할 곳이 없으면 맞아야 합니다. 눈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하고 나무가 쓰러지더라도 계곡물이 꽁꽁 얼어 갈라지더라도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견뎌내야 합니다.


겨울산에 올라 본 적이 있으신지요. 십여 년 전, 광천 요양원에 한동안 있었습니다. 요양원에서는 환자들을 위해 매주 두 번 밖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가고 싶은 이들은 버스를 타고 산으로 갔습니다. 조서산은 비교적 가까웠고 오서산은 다소 멀었습니다. 오서산은 791미터의 높은 산인데다가 여러 면에 자락을 걸치고 있는 산이라 올라가는 입구가 다양했습니다. 겨울날 오서산에 오르노라면 산이 시스루 옷을 입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잎을 떨군 나무들이 갈색의 겉옷을 걸친 것 같았으니까요. 흰 속살이 온통 비치는 겉옷.


791미터 정상에 오르면 적막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따뜻한 물을 마시려고 가져온 보온병을 열었습니다.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손이 꽁꽁 얼었으니까요. 몇 번이고 시도 끝에 연 보온병에서는 김이 하얗게 올랐지요. 나 혼자였습니다. 세상은 온통 하얬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대무변한 우주가 이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겨울산을 오르거나 내리는 일은 모두가 인내입니다. 산도, 사람도, 나무도, 흙도, 눈도 모두 견디고 있습니다. 화자가 문득 거기에 생각이 미쳤던 모양입니다. 발자국 소리를 듣다가 그랬는지 혹은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따끈한 차를 마시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화자는 너도 견디고 있구나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산에 비해 짧은 인간의 삶을 떠올렸던 모양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세 들어 삽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세란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지불하고 일정 기간 어느 장소에 사는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70여 년의 세월을 이 세상에 온전히 기대어 삽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모든 것을 세상에 기대어야 합니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먹거나 자거나 그 모든 일이 세상에서 이뤄지지요. 하지만 산에 비해 인간의 삶은 비교적 짧습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에 무엇을 지불하나요? 우리는 세상에 알몸으로 옵니다. 갈 때도 알몸으로 가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소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감정을 경험합니다. 아. 세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나누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몸으로 경험하는 감정, 의지, 욕망. 그것은 우리들끼리, 인간들끼리 필연적으로 나누는 것이지요. 그 외 무엇이 있을까요.


인간의 몸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 때문에 울고 생각 때문에 웃고 생각 때문에 즐거워하고,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요. 생각과 감정은 하나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 둘이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부산합니다. 생각이 많으면 이런저런 감정도 연달아 따라오지요. 생각도 감정도 우리 몸과 마음에 깃들어 삽니다. 단 그것들은 한결같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합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처럼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이 바뀌고 또 바뀝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세를 사는 것처럼 생각도 감정도 우리 몸에서 잠깐 살다가 나가는 것이지요. 오늘 아침, 저는 아홉시가 채 되기 전에 나가 장을 봐왔습니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가려다가 눈을 보고 들어와 우산을 집어 들었습니다. 눈을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오가는 이들이 많아 골목길은 활기로 넘쳤습니다. 추웠지요. 슈퍼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 다들 명절을 준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초인종을 누르니 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기다리노라니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어제 보았던 새가 전깃줄에 앉아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슈퍼에 다녀온 시간은 삼십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과 마음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이지요. 그 생각이 나에게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그렇거니 하고 그 생각에 따랐습니다. 다른 이들을 보고 마음이 바빠진 것은 내가 다소 초조해졌다는 의미이고 대문을 빨리 열어주지 않았다고 약간 짜증이 난 것은 손에 든 물건이 많아 무거워서입니다.


생각도 감정도 나를 스쳐 지나갔으니 그것들이 아주 잠깐 나에게 세를 들었던 것이 맞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겪는 사건이라고 해도 내가 가진 조건에 따라 생각과 감정을 달리 만들어낸 것이지요. 나는 그저 물건을 두어 개 샀을 뿐이지만 많이 산 사람은 배달을 시킬까 그냥 들고 갈까 혹은 누군가를 부를까 고민하겠지요. 오늘 어떤 물건이 세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더 많이 살까 고민하겠지요. 혹은 진로 슈퍼에서는 계란이 한판에 2980원인데 시장 앞 화곡 슈퍼에서는 계란이 5980원이니 굳이 멀리 있는 이곳, 진로 슈퍼까지 왔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기회를 잘 만났다고 좋아하겠지요. 그가 싼 물건을 사기 위해 지불한 것은 시간입니다. 이런저런 광고지를 들여다볼 시간, 이런저런 물건의 가격을 비교할 시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가요. 보는 시간, 비교하는 시간, 그리고 가치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시간. 화자가 언급한 기회주의자들의 고통은 단순한 일상의 것이 아닐 겁니다. 기회주의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기회를 잡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매번 그는 저울질을 거듭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요. 늘 눈에 불을 켜고 이곳저곳 찾아다녀야 합니다.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세상 어디에 가나 그런 이들을 보고 또 만납니다.


집으로 오면 오직 나에 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가족과 나의 삶에 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안정적이 되는 거지요. 밖에 나가면 보고 듣는 것이 많아 다양한 자극을 받고 그렇게 되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생각이 많다고 해서 지혜로운 이는 아닙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기회주의자는 생각이 많아 고통이 많다고 말하는 거지요.


화자가 만난 겨울산은 생각으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겨울산은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는 인내의 화신과도 같아서 이리저리 생각을 돌리면서 휙휙 건너뛰는 기회주의자와는 정반대에 서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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