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에서 홀로입니다. 고독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회 활동은 내면의 광야에서 울부짖는 목소리를 잠재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당신이 세상으로 나갈 때, 자신의 일부를 잃고 돌아온다고 말했습니다. 고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외롭고 산만한 사회의 소음이 당신을 거짓된 소속감으로 유혹할 것이며, 공허하고 지치게 될 뿐입니다.
자신의 고독을 마주할 때,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황량함의 감각이 점점 진정한 소속감으로 변화합니다. 이는 느리고 열린 전환 과정이지만, 당신 자신의 개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당신의 삶 속에서 진정한 집을 찾는 끝없는 과제입니다. 이는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마음의 집에서 편안히 쉬는 순간, 문과 창문이 세상을 향해 열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당신의 고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되면,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진실되고 창조적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이나 외부의 프로젝트로부터 은밀히 인정을 구걸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당신의 마음을 집으로 데려오는 이 일은 수년이 걸리는 느린 작업입니다.
Eternal Echoes: Celtic Reflections on Our Yearning to Belong (1999)
지하철을 타면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보고 심지어는 자전거를 타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현대인이 그처럼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흥미로워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게임을 하는 이도 있고 드라마를 보는 이도 있고 뉴스를 보는 이도 있으니까요. 물론 유튜브로 교육 영상을 시청하는 이도 있겠지요. 그런가 하면 SNS로 소통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하철 혹은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은 어쩌면 우리가 혼자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겁니다. 집에서처럼 편안한 복장이 아닌 다른 이를 만날 준비를 갖춘 채로 혼자 있는 시간. 그렇기에 나를 만날 수 있는 더욱 소중한 시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고독을 직면하지 않도록 돕는 도피처가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회에서 하는 활동의 대부분은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직이 존속하기 위한 활동들이고 더 나아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임을 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광야에서 나를 찾도록 외치는 목소리를 잠재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화자가 신비주의자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을 빌려 세상으로 나갈 때, 자신의 일부를 잃고 돌아온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우리는 연결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더 고립되고 있음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사회의 외로운 산만함과 소음이 당신을 거짓된 소속감으로 유혹할 것이며, 그곳에서 당신은 공허하고 지치게 될 뿐이라고 한 것이지요.
진정한 자아는 자기 내면과 먼저 연결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물론 느립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나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나는 홀로 설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확인해 주지 않아도 되는 나가 진정한 나입니다. 그렇게 될 때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도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때, 넓은 인맥과 관계가 사회에서의 성공을 가름하는 잣대가 되는 이때 고대의 이 지혜는 얼마나 소중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