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4호 소개>
이름: 권서열 팀장
닉네임: 단톡방 읽씹 장인, 일정 변경 마법사
특기: 카톡 읽고 바로 답장하지 않기, 결정 먼저 내리고 공유는 나중에 하기, 팀 내 중요사항들 일방적으로 통보하기, 윗선에는 ‘합의했다’고 말하며 팀원들에게 설명 안 하기
< 야류키의 관찰 메모>
”통보는 빠르고,
설명은 느렸다.
읽음 표시는 남았지만,
설명은 남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9시. 팀 단톡방에 메시지가 뜬다.
“다음 주부터 저희 팀은 재택근무 금지입니다.
내일부터는 전원 출근 부탁 드립니다.”
메시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니 재택근무가 업무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기사가 나온다.
23명이 있는 팀 단톡방. 권서열 팀장이 보낸 메시지의 읽음 표시는 0이 되었지만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의견을 표현하지 않으면 합의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권서열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지만 단톡방은 여전히 조용하다. ‘네’라도 답하든 ‘왜 그런 거죠?’라고 묻든 재택근무는 비효율적이라는 답변만이 돌아올 테니까. 하늘이 유난히 맑고 화창했던 어느 날, 야루키 사원 팀의 재택근무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올해로 2년 차가 된 권서열 팀장. 그의 리더십은 ‘신뢰’보다 '권력'과 ‘서열’에 더 가까웠다. 팀원들에게는 언제나 최종 결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할 뿐, 사전 공유나 합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속에는 책임이 빠져 있었고 종종 잘못된 내용을 전달해 팀원들은 매일이 혼란스러웠다.
매년 9월이면 C 레벨 보고를 준비했기에 올해도 8월부터 보고를 준비했다. 팀원들은 보고 때 시연할 데모를 위해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8월 내내 야근과 특근을 반복했다. 데모 준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주간회의, in depth 리뷰, 개발회의, 협력업체 미팅까지. 하루에 절반 이상 회의가 잡혀있었다. 회의가 너무 많으니 저녁을 먹고 나서야 겨우 일할 시간이 생겼고 야근과 특근을 하지 않으면 정해진 기한 내 절대 마무리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회의가 많아진 이유는 단 하나다. 권서열 팀장이 개발파트에서 진행하고 있는 방식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계속 회의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해가 안 되면 윗 선에 제대로 보고할 수가 없다는 게 그의 논리인데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설명해도 그건 틀린 것 같다,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팀원들이 열심히 고민한 끝에 찾아낸 효율적인 방법도 권 팀장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게 되어버린다.
"데모 시나리오가 달라진 것 같은데 뭐죠?"
“지난주 회의 때 이 방법이 조금 더 효율적이라
변경했고 팀장님께도 메일로 내용 공유 드렸습니다.”
“야루키 사원, 그 방식으로 변경해서
데모가 잘 안 되면 책임질 수 있어요?”
“….”
결국 시나리오는 권서열 팀장이 제안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시나리오에 맞춰 급하게 기능을 수정하느라 팀원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야근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옆 팀 차장님에게 C 레벨 보고가 1달 뒤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보고가 일주일 뒤도 아니고 무려 한 달 뒤로 연기되었다는 걸 권 팀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야루키 사원이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보고를 3일 앞둔 날이었다.
“팀장님, 보고 일정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
“아! 제가 주간회의 때 구두로 공유드리지 않았나요? C 레벨 보고는 연기되었지만 내부 보고는
예정대로 진행될 예정이라 원래대로 준비해 주세요. 어차피 다음 달에 보고할 건데
미리 준비하면 다 같이 좋은 거잖아요?”
당당한 권 팀장의 기세에 야루키 사원은 할 말을 잃었다. 데모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야근과 특근을 해서라도 무조건 마무리해야 한다던 권 팀장은 보고가 미뤄진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걸 왜 팀원들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럽던 중 팀 단톡방에 권 팀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들 저녁 아직 안 먹은 것 같은데
오랜만에 다 같이 밖에 나가서 저녁 먹을까요?
제가 전할 말도 있고 해서요”
권 팀장은 밥 먹는 내내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본인도 힘들다고, 본인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즈음엔 모두 기운이 빠져 버렸지만 그는 끝까지 지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매주 주말마다 출근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여러분도 그 정도 열정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내일 누가 출근하는지 다 지켜볼 겁니다. “
아무도 답변을 남기지 않았던 단톡방처럼 이번에도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야루키 사원은 권력이 실행되는 속도와 신뢰가 쌓여가는 속도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권력은 즉시 작동하지만 신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남은 국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야루키 사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팀원들을 관리하지 않는다.
그저 통제할 뿐이다. “
자료를 정리하고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 되어간다. 불금은 잊힌 지 오래였고 주말이 사라진 지도 몇 주가 되어간다.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평소처럼 출근할 예정이다. 일찍 잠들까 하다가 어제 읽던 책을 펼쳤다. <또라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유>라는 소제목이 눈길을 끈다.
”인생을 살며 이런 소시오나 또라이를
안 만나는 게 좋겠지만 어쩌겠는가.
살다 보면 두세 번은 만나게 된다.
불행히도 이런 사람이 상사라면?
예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는
이들을 대하는 법을 이야기했다.
1) 가능한 부서를 옮겨라.
2) 옮길 수 없다면 그들이 항상 당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3) 그들과 경쟁하거나 교화시킬 생각은 하지 마라. 그저 윈윈 상황을 만들어라. 그가 이기게 해 주면서 당신도 이기는 상황을 만들어라.”
<일의 격>, 신수정, P 181
야루키 사원은 마지막 문장 전체에 밑줄을 그었다. 그가 이기게 해 주면서 당신도 이기는 상황. 그걸 만들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시작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소시오 상사나 또라이 상사와 잘 지내는 법을 익히면 이 세상 그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