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그 불확실한 벽

by 야루키사원



<빌런 2호 소개>

박명분 과장 (본인이 하는 일만 ‘명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 닉네임 : 명분왕, 내로남불

- 특기 : 자기 합리화, 잘못도 포장해서 다 명분이 있었다고 우기기, 반박이 들어오면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남탓하기


<야루키의 관찰노트>

“확인되지 않은 말도

명분이라는 이름을 얻으면

사실만큼 강력해진다. “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684p



내가 말하면 정답이고,

네가 말하면 오답이야.

내가 찾으면 잘 찾은 거고,

네가 찾으면 잘못 찾은 거야.

내가 보고하면 잘된 보고이고,

네가 보고하면 애매한 보고인 거야.

내가 하면 합리, 네가 하면 불합리.

내가 하면 다 뜻이 있고 명분이 있는 것,

네가 하면 원칙을 거스르는 것.

본인이 하면 다 ‘로맨스’, 남이 하면 다 ‘불륜’.

박명분 과장은 마치 불확실한 벽처럼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형상을 바꾸고 해석을 달리 한다.



“A팀에서 시도하려는 개인화는

저희가 제안하는 개인화와 차원이 다릅니다.

이 방법은 매우 혁신적이며 이를 통해

그동안 A팀에 부족했던 개인화 기능을

고도화시키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A팀이나 우리 팀이나 똑같이 ‘개인화’라는 단어를 핵심 키워드로 사용하고, 시스템 구성도도 멀리서 보면 같은 자료로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야루키 사원 : “혁신적인 개인화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의 개인화를 말씀하는 걸까요?"

박명분 과장 : "개인화는 말 그대로 개인이 필요로 하는 걸 맞춤형으로 제공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개인화를 이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명분이 있을까요?"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해서 질문을 했더니 돌아오는 건 애매모호한 답변과 명분 찾기 뿐이었다. 본인이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질문이 들어오면 반박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척하다가도 금세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야루키 사원은 ‘말 그대로 개인이 필요한 걸 맞춤형으로 어떻게 제공해 주는 거냐’고 한 번 더 물어보려다가 다른 회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많이 봤기 때문에 질문을 마음속으로 접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같은 정보도 중요도를 달리했고, 같은 의견도 전혀 다르게 평가했다. 그 기준이란 걸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기준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건너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해도 되지만,

너는 확실하게 증거 있는 이야기만 발언해.

네가 말한 건 하나도 안 중요해,

하지만 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중요해지지.

- 박명분 과장


박명분 과장의 명분 찾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 세미나에 참석해 우리 팀과 비슷한 시스템을 먼저 구축한 B업체 담당자와 긴밀하게 소통해 개발 인력이 7명이란 걸 겨우 알아냈다고 한다. 박명분 과장이 고급 정보라고 말하는 투입 인원 7명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발표자가 잘 몰라서 10명인데 7명이라고 했을 수도 있고, 원래 17명인데 외부에 알리기 싫어서 7명으로 줄여서 말했을지도 모른다. 정식 회의가 아니라 세미나에서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구두로 전한 답변은 대충, 적당히,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이대로 상무 : “그런데 A업체는 외주용역을 많이 쓰지 않나요?

실제로는 그것보다 인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야루키 사원 : “맞아요. 몇 년 전에 A업체와 프로젝트를 같이 했는데

100% 외주용역을 쓰더라고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대로 상무가 지나가듯 이야기했을 때 야루키 사원이 덧붙인 한 마디 가 결국 박명분 과장의 발작버튼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박명분 과장 : “하… 지금 그들이

외주 용역을 썼는지 안 썼는지가 중요한가요?

이 과제의 명분을 찾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박명분 과장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한 옥타브 높아졌다. 순간 회의실에는 7초 간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 회의의 목적은 내년 과제의 방향성 설정과 그에 따른 필요 비용 그리고 투입 인원수 확정이다. 비용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인원 수가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한 걸까. 야루키 사원은 그 숫자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고 상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다음 내용을 설명해 달라며 화제를 돌린다. 야류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의실이 토론의 장이 아니라

명분 법정이 되어 버렸네.’



자기 합리화는 순간적으로 체면을 세워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갉아먹는다. “내가 말하면 정답, 남이 말하면 오답”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사고방식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자기 합리는 오직 본인만 살리지만, 진정한 합리는 조직과 구성원을 살릴 수 있다. 잘 모르거나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다"는 솔직한 한마디가 명분을 살리기 위한 미사여구 100개보다 훨씬 더 강력할 테니까.


결국 회의는 박명분 과장의 명분 토론으로 끝났다. 명분은 많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없었다. 남은 건 결론 없는 회의록과 모두의 피로감뿐이다. 더 큰 문제는 내일도 모레도 이 토론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확인된 사실을 더 철저히 준비해서 다음에 다가올 불확실한 명분의 벽을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벽을 넘어 뜨리면 또 다른 문이 되기도 하니까.

렛츠 기릿!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206p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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