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슈퍼스타, 그가 돌아왔다

by 야루키사원



<빌런 1호 소개>

최티승 과장 (티 내서 승진하거나 성과를 잘 받으려는 사람)

-닉네임: 티 내기 승진러, 성과·승진 집착러, 9월만 사는 사람

-특기: 고과 시즌에만 반짝 열심히 일하기, 다른 직원이 한 것도 내가 한 것처럼 티 내기


<야류키의 관찰 메모>

“티 내는 능력도 실력일 수 있지만

남의 성과를 이용하는 순간

그것은 가면이 된다"






9월과 10월.

매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고과 시즌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집 나간 며느리가 가을 전어냄새를 맡고 집으로 돌아오듯, 봄과 여름 내내 존재감이 없었던 그분이 서서히 고개 들어 돌아온다.




“내년도 사업계획서 초안입니다.

이 자료는 제가 관련부서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작성 중입니다.

과제의 주요 방향성은

제가 기획하고 제안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회의실 중앙 스크린 위로 처음 보는 자료 하나가 등장했다. 관련부서와는 긴밀하게 협력 중이라면서 내부에는 한 번도 공유한 적 없는 자료. 팀원들과 사전 협의가 되지 않은 낯선 자료. 하지만 꿈에서 본 것 같이 묘한 기시감이 든다.

어디서 많이 본 도식인데.. 많이 본 워딩인데..



문득 몇 주 전 타 부서에서 공유한 보고 자료가 떠올랐다. 비슷한 그림이 있는 슬라이드를 복사 후 최티승 과장이 직접 취합했다는* (*역주 : 직접 만들지는 않았으므로 직접 취합한으로 표현한다) 자료 뒤에 원본서식을 유지해 붙여 넣는다.



조심스럽게 스크롤 다운과 스크롤 업을 반복한다. 마치 신호등처럼 몇몇 글자들의 색깔만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깜박거릴 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글씨 색깔만 다르고 100% 완벽하게 똑같은 자료였다. 글자색 또한 기획의 영역이라면 할 말이 없다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획과 그가 주장하는 기획은 너무 달랐다.



스스로 기획하고 제안했다는 내용도 자세히 읽어보니 얼마 전 다른 팀원이 만든 자료랑 비슷하다. 다른 사람이 만든 자료를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상위 조직 책임자에게 먼저 보고해 버리는 건 그의 주특기 중 하나다.


문제는 이 작전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특히 분별력 없는 상사들에게는 더더욱. 회의실 가운데에 앉은 최고 상사는 긍정의 의미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상사의 반응을 보더니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듯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한다. 그의 목소리가 커져갈수록 팀원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간다.


‘아.. 다시 9월이 돌아왔구나.’


말로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마음속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야류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몸에 티 내기 센서가 있는 건가.

9월만 되면 티 내기 모드 ON이네.’





“최티승 과장님, 준비하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하반기 C레벨 보고에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진행 부탁 드려요. “

“이제 시작이죠 뭐. “



상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최티승 차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손바닥을 마주쳐야 박수도 치고, 사기도 칠 수 있다. 그는 고과를 걸었고, 상사는 임기연장을 걸었다. 혹여 이 판이 엎어지더라도 잃는 게 많은 건 상사 쪽이다. 올해 말 계약 연장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고 나아가 지푸라기를 황금 동아줄로 변신시켜야 한다.


때로는 적절한 티 내기가 필요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쉬운 곳이 회사니까.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건 직장인의 생존 기술일 수도 있다. 다만 그는 늘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평소엔 조용하다가 고과 시즌이 오면 갑자기 바빠졌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결과물 위에 자기 이름을 얹는 데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내실 없는 티 내기는 언젠가 한계에 다다를 거고 그때가 되면 상사와 팀원 모두에게 신뢰를 잃게 될지 모른다. 야루키 사원은 생각했다. 매년 시즌제로 티를 내기보다는 티 나지 않는 일이라도 스스로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겠다고. 그 과정들이 진짜 ‘경험’이자 ‘경력’으로 내 안에 축적될 것이라고.


고과 시즌이 끝나면 최티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1년 뒤,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9월의 슈퍼스타이고, 9월은 그의 주력 무대이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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