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은 내편, 이스라엘 입을 빌려 이란을 규탄하다

by 고대영

2021년 새해를 맞았다. 국제부에 온 지도 이제 3개월 정도. 슬슬 외신 번역도 익숙해지고 업무에 여유를 느낄 무렵, 첫 과제를 안게 된다. 첫 과제란 한국과 관련된 해외 이슈를 의미한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이건 국제부가 맡아야…] 시간이다.

제목 없음.png 사이드 하티브자데 이란 외무부 대변인. 출처 이란 외무부 홈페이지

난데없이 이란 혁명수비대가 우리나라 국적 유조선을 나포했다는 것. 대략 외신을 살펴보니 얌전히 항해하던 배의 선로까지 틀면서 이란이 자국 영해로 데리고 가는 상황이었다. 해당 선박이 해양 환경 규제를 반복적으로 위반했다는 게 이란 측의 공식 입장이지만, 그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고서야 한국에 동결된 자국 자금 70억 달러를 풀어 달라는 속내를 드러냈다.


2월 말이 돼서야 양국이 동결자산에 대해 합의했지만,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해결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이란이 미국 제재 당시 묶인 한국 내 자금을 돌려 달라는 상황. 우린 그야말로 둘 사이에 낀 형국이었다.


또 마침 이란 군부 실세였던 가셈 솔레이마니가 미국에 의해 '핀셋' 사살된 지 1년이 되던 때였고, 인근에선 미군 항공모함이 훈련을 마치고 해상 대기 중이었다.


취재에 들어갔다. 이란 외교부를 시작으로 대변인,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컨택했지만,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이란 관영 매체 보도만 받아 적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이란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스라엘의 입장이라도 받아보자 생각했다. 당시 한국 선박이 나포됐는데도 미국을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괜찮다. 목소리를 안 내면, 내게 하면 되는 거다.


이란 총리실과 국방부, 외교부 등 어지간한 정부 부처에 연락을 돌렸다. 총리실에서 답변이 왔지만 쓸 수 없었다. 별 중요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미에 ‘오프더레코드’를 요청한 탓이다. 비보도 전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더 전했다.


“다른 부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건에 대해선 다들 말 못 합니다.”


그만 좀 쑤시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쉽지만 총리실 답변이기에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취재도 접어야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이스라엘 외교부에서 부대변인 성명으로 답이 온 게 아닌가.


“불법” “인질 납치” “범죄 조직”


답변에는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수위 높은 비난이 가득했다. 나야 당연 고마웠다. 무사 귀환을 바란다는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총리실과 외교부가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았을 리 없고, 좀 의아했다. 약간 추리를 해보자면, 당시는 이란이 핵시설의 우라늄 농축 농도를 느닷없이 올리면서 이스라엘의 심기를 건들던 때였다. 이스라엘의 발언이 세지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결국 영원한 적도 없지만, 적의 적은 내편이라는 것도 끄덕여졌다. 그렇게 주말 당직도 아닌 내가 주말에 기사를 내게 됐고, 노력한 보람은 조회수로 대신했다.



온라인 각종 커뮤니티에선 내 기사를 보고 여러 반응을 내놨다. ‘역시 히틀러가 잘못했네’부터 시작해 ‘괜히 태극기 부대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같이 드는 게 아니다’까지 참신한 소리들이 많이 나왔다. 팔레스타인 문제로까지 끌어들여 새로운 공론의 장을 만드는 의견들도 제법 있었다. 기사 하나가 이렇게 무섭다. 그러니 잘, 조심히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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