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은 안 해요. 등원은 합니다.

불량한 하루

by 불량아빠

아침 - 아이 兒


매일 아침 출근을 알리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도 잠을 깨는 게 참 힘들었다. 아침잠이 그토록 달콤했던 것은 눈을 뜨면 그려지는 하루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매번 그 도피에 실패하고 올라탄 지하철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붐볐다.


육아 휴직 첫날 아침은 어떨까.

그토록 기다려온 도피 첫 아침이 밝았다. 기대와는 달리 아침잠은 여전히 달콤했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간밤 머릿속에서 그려본 새로운 하루로 마음이 조심스레 일렁였다.


저 멀리 들려오는 잠에서 깬 아이의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났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롯이 본인 담당이었던 탓인지, 이제는 복직한 아내가 반사적으로 먼저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내 시선이 아내에게 닿았을 땐 이미 아내가 반수면 상태로 아이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참 대단하군'

배부른 감상을 마치기도 전에 그간 내게는 어색했던 문장으로 아내를 멈춰 세웠다.

"여보, 출근하려면 아직 멀었어, 더 자"

든든한 남편이고 싶은 마음과 서툰 아빠의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아이의 방을 향해 성금 걸음을 옮겼다.


인생 15개월 차의 아이는 아침부터 어설픈 발음으로 "압바(아빠)"를 부르며 씩 웃어 보였다. 늘 아내의 몫으로 애써 모른 척했던, 아이와 함께 하는 아침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오전 7시 아침 놀이

오전 8시 아침 식사

오전 9시 등원 준비

오전 9시 30분 등원


부단히 바쁜 아침을 보내고 아이와 등원길에 나섰다.

'아빠! 왜 아빠랑 등원해? 아빠는 회사 출근 안 해?'

아이가 1년만 더 컸어도 악의 없는 순수하고 아픈 질문을 내게 했을 것 같다.

이런 솔직한 대답을 할 수도 있었을까?

'응, 아빠는 우리 아기 덕분에 도피 중이야'


괜한 생각을 하며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이를 안겨주었다.

오전 9시 30분, 이른 때에 나를 위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전/오후 - 나 我


어린이집 등원을 마친 부모들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간다. 누군가는 아침에 치른 전쟁통에 못다 한 청소를 하고 하원 후 아이가 먹을 간식을 만들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조금은 불량한 아빠일지 모르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우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하나.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할까?'


관성적으로 출근길에 올라 목적지의 출구와 가장 빠른 열차 칸으로 향하던 때와는 다르게 고민이 들었다. 내 앞에 펼쳐진 선택지는 많았지만 선택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확신을 가질 기준이 없어 질문을 조금 바꿨다.


'나는 무얼 할 때 가장 나다울까?'


문득 아내가 종종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야. 그 에너지를 발산할 때 눈이 반짝 빛나"


20대 초반에는 학교 응원단으로 교우들 앞에서 응원 동작으로 나를 표현했다.

26-27살에는 직접 준비한 사업 아이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투자자와 심사위원들에게 했다.

그러나 오늘 육아휴직의 첫 아침을 맞은 35살 아저씨는 당장 할 수 있는 동작도 말할 대상도 없었다. 동작과 말을 제외하니 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눈에 띄었다. 과거 브런치 작가 신청에 통과했다는 친구의 이야기와 함께.


곧장 카페로 발걸음을 옮겨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았다. 마치 켜켜이 쌓인 오랜 갈증을 해소하듯 첫 글을 써 내려갔다.

'조직 첫 사례', 어색함을 깨고 남성 육아 휴직을 선언한 이유

육아 휴직이 내게 갖는 의미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생각들을 화면으로 옮겨냈다. 마지막 엔터를 치고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오전 11시가 조금 안된 시간. 그제야 얼음이 녹아내린 커피를 처음 들어 올리며 오랜만에 시원한 해소감을 느꼈다.



저녁 - 兒 다음 다시 我


아이가 잠자리에 들고난 저녁 9시, 다시 나의 시간이 찾아왔다. 여전히 오늘 오전에 느낀 해소감에 취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에너지를 이토록 발산하고 싶었을까


직장인의 일상에는 '내가' 없다. 매일 찍어내는 문서와 일정을 꽉 채운 미팅은 철저히 조직과 제품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퇴근 후에는 고단함만 남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은 이미 소멸된 지 오래였다. 그저 늦은 시간까지 애꿎은 쇼츠를 초점 없는 눈으로 붙잡고 있었다.


육아휴직의 첫날, 저녁 10시, 만족스러운 하루가 이미 나를 또렷하게 채웠다.

아쉬움에 흘려보낼 영상이 필요하지 않으니 휴대폰을 내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느낀 만족감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 기꺼이 이른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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