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가 순례를 떠난 날 #1

by 김로윤

1.

버스 안의 공기는 난폭하게 틀어놓은 히터 바람과 공항으로 가는 승객들의 더운 입김으로 가득 메워졌다. 창밖에는 얼마나 가벼운지 소리도 없이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고 바깥의 추운 공기는 끝내 투명한 유리창을 뚫지 못하고 불투명한 색조의 습한 기운으로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 하나 같이 고개를 깔고 휴대전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아마도 본인이 떠나려는 여행지의 맛집이나 포토 스팟 따위를 검색하고 있을 것이었다. 버스 내의 공기가 건조해서인지 입술은 계속해서 말라 까슬까슬해졌다. 나는 입고 있는 경량패딩의 안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매끄럽지 못한 나의 검푸른 입술에 듬뿍 기름칠을 해주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차갑고 습한 창문은 어느새 창백한 얼굴로 내 옆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얗게 물든 창문에 나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손망치를 만들어 창문을 꾸욱 눌렀다. 하얀 여백에 검고 투명한 발도장이 덩그러니 놓였다. 그리고 발도장 위쪽에 검지로 다섯 개의 점을 찍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찍어놓은 발도장처럼 그것은 작고 불완전하지만 영락없는 내 오른쪽 발바닥이었다. 나는 순간 픽하고 웃어버렸다. 내 웃음소리가 주변에 들렸을까 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승객들은 느닷없이 터져 나온 내 실소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이번엔 왼손을 말아 쥐고 손망치를 만들어 왼쪽 발바닥을 창문에 찍어냈다. 이번에는 약간 위쪽으로 찍어서 걷고 있는 사람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걷고 있는 누군가의 발자국. 나는 그렇게 투명한 몇 개의 발자국을 더 만들어냈다. 어느덧 창문은 내가 찍어낸 발자국들로 도배되었고 창문의 여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한스러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외부의 온도와 내부의 온도의 극심한 차이로 인하여 첫 번째 발자국은 이미 중력의 영향을 받아 물방울이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입술에 잔뜩 발랐다. 립밤 역시 주머니 속 따듯한 온도 때문에 입술에 닿자마자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입술에는 스틱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손톱만큼의 오래된 립밤이 동물성 지방의 찌꺼기처럼 붙어있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입술을 여러 번 문질렀다. 입술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과일주스에 돼지 지방을 갈아 넣은 냄새가 났다. 번들거리는 새끼손가락에는 여전히 립밤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반대 손바닥에 닦아냈다. 꺼칠한 손바닥은 체리향인지 사과향인지 아니면 비계덩어리의 악취인지 구분할 수 없는 냄새가 도포되었다. 나는 립밤을 반대쪽 주머니에 넣었다. 반대쪽 주머니에는 경량패딩을 작게 패킹할 수 있도록 딸려 나온 같은 원단의 파우치가 접혀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펼쳐보았다. 손바닥 두 개 정도의 사이즈인 그 파우치를 보고 그제야 모래를 담을 파우치를 안 챙겨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런. 한심한 여자야.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짐을 싼 거야. 나는 자기 비하의 목소리를 담은 심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파우치를 다시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미리 준비해 둔 파우치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모래는 이 파우치에 담으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되면서 근거 없는 안온함이 스며들었다. 짧게 토막 난 탄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곳을 향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기분의 들뜸과 가라앉음의 반복 속에서 무감각으로 변질되었다. 여전히 버스 안의 승객들은 고개를 꺾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중이었고 창문에는 내가 만든 발자국들이 물방울로 맺혀 아득한 음영을 머금은 채 애절하고 느린 선율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출국장 입구에 도착한 셔틀버스는 잠시 멈추었다가 금속성의 기계가 긴 한숨을 내쉬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 문을 열었다. 숨 가쁘게 머금고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나며 거대한 버스의 차체도 땅 속으로 기어들어갈 것처럼 축 내려앉았다.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등 뒤에서 날카로운 삭풍이 목덜미를 할퀴었다. 나는 경량패딩의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지퍼를 끝까지 채워 올렸다. 어둠을 완전히 몰아낸 이른 아침 하늘에서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았다. 비행기는 예고된 시각에 정확히 이륙할 것이었다. 버스기사는 차체 아래의 위치한 짐칸의 문을 연 뒤 허리를 숙이고 어두운 짐칸에 기어들어가다시피 몸을 반쯤 구겨 넣은 다음 빨간색 배낭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버스에서는 뒤늦게 일어선 승객들이 시리얼처럼 불규칙하게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체크인을 한 뒤 수화물을 부치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배낭하나뿐이라고 해도 짐은 짐이었다. 몸이 가벼워지니 그제야 노인네 생각이 났다. 지금쯤은 일출을 보고 아침을 드시고 계시려나. 바닷가 근처에서 전복죽을 팔면 좋으련만. 아무리 바닷가라고 해도 꼭두새벽부터 전복죽을 파는 식당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네라면 전복죽도 먹고 후식으로 전망 좋은 카페에 가서 모닝커피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운전이며 최신 스마트폰으로 내비게이션을 볼 줄 아는 양반이었으니 전복죽 먹는 일은 노인네에게 일도 아닐 것이다. 비행기 탑승시간까지는 두 시간 남짓 남았다. 그동안 해외에서도 유명하다는 공항 내에 면세점을 둘러보며 쇼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통장에는 그 정도의 여유까지는 없었다. 면세점에서 구매하면 백화점의 절반값으로 살 수 있다는 명품향수도 시향만 해보고는 과감하게 뒤돌아섰다. 나는 공항 내를 어슬렁 거리다가 육천 원이나 하는 아이스커피를 한잔 마시고 탑승게이트 앞 간이 의자에 앉아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티브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 안에서는 싸구려 원두의 시큼하고 쓸쓸한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어느덧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탑승게이트 앞쪽에 승무원들이 탑승수속을 준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 둘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나도 나른한 몸을 일으켜 세워 대열에 합류했다. 티브이에서는 사고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기자는 봉화에서 울진으로 가는 36번 국도에서 승용차와 덤프트럭이 충돌하는 사고를 전하고 있었다. 화면은 사고 현장을 비추었고 두 동강이 나버린 회색 승용차 아래로 기름얼룩인지 핏자국인지 모를 검은 얼룩들이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치명적으로 적시고 있었다. 기자는 승용차에 탑승한 칠십 대 여성과 사십 대 남성이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멘트를 끝으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파악 중에 있다며 마무리했다. 뉴스를 본 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발 밑이 흔들거림을 느꼈고 머릿속에는 나쁜 기억의 섬광이 아찔하게 비켜갔다. 뉴스에 나온 차량은 노인네가 끌고 간 차와 같은 차량이 틀림없었으며 노인네는 칠십 대였고 그의 아들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십 대였다. 나 역시 오랫동안 나를 향했던 노인네의 경멸에 혐의를 두고 내 발목을 잡는 노인네의 칙칙한 절망감과 계획적인 적의에 대해 냉소를 보내며 살아왔지만 그 노인네 얼굴에 만발한 저승꽃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노인네는 떠나기 전에 나에게 죽음을 예고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예고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것일까. 죽음은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수천 가지 음모와 수만 가지 계산을 끝내고 당사자들 모르게 은폐엄폐하며 결국엔 정확한 조준으로 덮쳐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수천 가지 계략과 수만 가지 술수를 가지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인가. 나는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승무원에게 내밀었다. 비행기는 변함없이 예고된 시각에 이륙했다.


2.

집으로 가는 길목에 나란히 서있는 가로등은 마치 다투고 잠시 냉전 중인 어린 연인들처럼 보였다. 오른쪽에 서있는 가로등의 전구가 외롭게 명멸했다. 다투고 난 뒤 먼저 화해를 청하고 싶은 어느 한쪽의 마음이 꼭 저럴 것이다. 먼저 사면의 손길을 내어주면 좋으련만. 내 맘도 몰라주고. 치. 하는 그런 순수한 마음. 순수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은 경사였지만 꽤 긴 거리라서 시월 중순까지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곤 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보장된 그 경사는 힘겨운 나날들의 비탈진 경사를 더욱 가파르게 만들었다. 노인네는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당뇨로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 노인네는 뒤뚱뒤뚱거리며 늙은 오리처럼 나를 따라왔다. 손에 쥐어진 검은 봉투에서는소주 두 병이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공허한 소리는 온몸에 번진 화장실 지린내와 함께 나 그리고 노인네 곁에서 힘겹게 경사를 오르고 있었다.

<스페인은 언제 가시우?>

나이 많은 경비의 우스꽝스러운 말투가 또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경비실 옆에 새끼오리를 두 마리 키우고 있는 경비는 퇴근길에 간혹 마주치면 나에게 물었다. 머리가 벗어진 경비는 쭈그려 앉아서 오리가 마실 물을 종이컵에 따르고 있었다. 털갈이를 하는지 오리털이 가볍게 땅바닥을 뒹굴었다. 경비의 말은 어찌나 가벼운지 땅바닥을 뒹구는 오리털 같았다. 그는 쭈그려 앉은 채로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오리에게 물을 먹였다. 스페인은 언제 가냐는 물음이 마치 오리에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 경비의 벗어진 머리에는 늘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 땀으로 젖은 얼마 남지 않은 소갈머리는 천박하고 지저분하게 엉겨있었다. 나는 여자랍시고 내 몸에서 나는 지린내가 그의 콧속으로 들어갈까 봐 몇 걸음 떨어져서 대답했다.

<스페인은 더운 나라니까 추워지면 가야죠.>

나는 이 말을 재작년 봄에도 작년 여름에도 올해 가을에도 경비에게 했었던 것 같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경비는 자신도 조금만 젊었다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거라며 나를 붙잡고 자신도 평생 가보지 못한 순례길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했다. 경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빤히 보더니 내 어깨너머 허공을 응시했다.

<오늘은 어머니가 안보이시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노인네가 중간에 어디로 샜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동도 불편한 노인네가 야밤에 돌아다니다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 삶이 몇 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건 노인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앞길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창창한 내 미래를 노인네에게 저당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 오시겠죠 뭐. 이만 들어갈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가씨. 힘들지만 여기 오르막길 걸어 다녔던 게 순례길 걸을 때 도움이 많이 될 거요. 하루에 삼사십 킬로씩 걷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거든.>

나는 경비의 말을 눈웃음으로 무시하고 어둑어둑한 계단을 올라섰다. 오 층짜리 아파트에는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다. 힘겹게 육체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뒤에 바짝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숨이 막히고 칼날 위에 서있는 사람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내 앞을 재빠르게 스쳐갔다. 이마에서는 공포로 물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먼지와 기름때를 잔뜩 묻힌 바람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곧이어 고소한 튀김냄새가 스쳤다. 나는 맥이 풀리면서 한쪽 벽에 기대었다. 삼층과 사 층 사이의 어둠 속에서 나는 배달기사가 치킨을 배달하는 광경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 기댄 나를 무심코 지나가는 배달기사의 입에서는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배달기사의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완전히 달아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힘겹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땀으로 젖은 귓바퀴에 욕설이 낭자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주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솔기가 뜯어진 얇은 점퍼를 벗고 너절하게 색이 바랜 청바지를 벗고 땀으로 젖은 냄새나는 티셔츠를 벗고 양말을 벗고 브래지어를 풀고 팬티까지 벗었다. 팬티는 만성대하증 때문인지 방금 전 공포에 질렸던 탓인지 냉으로 축축했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젖가슴 아래에는 손톱으로 긁어서 생긴 흉터들이 불규칙하게 그어져 있었다. 검붉었던 흉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갈변되었고 나는 반쯤 깎다만 사과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팬티를 세면대에 던져놓고 욕조에 물을 틀어놓은 뒤에 알몸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집에 들어온 걸 이미 눈치챘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방문 쪽을 바라보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은 반바지와 목이 늘어난 회색 티셔츠가 전부였다. 그의 옷을 벗기자 늘어진 살색 피부 위로 몇 개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보고 만져왔는대도 불구하고 흉터는 마모되지 않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의 흉터를 보아도 감정이 요동치는 일은 없다. 그 흉터를 만지는 게 타성에 젖은 행동이 되었을 뿐.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 관성이란 망각에 가속도를 붙여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흐릿한 눈빛은 확실히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허리를 숙여 가벼운 체구를 안아 들어 올리자마자 그는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여자의 힘으로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어느새 가벼워졌다. 허공을 뒹구는 오리털처럼.

<뱀파이어야. 뭐야. 또 어머니가 이상한 영화 틀어준 거야?>

나는 그를 안고 욕실로 걸어가며 침을 흘리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내 목덜미에 축축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 몸에서는 땀냄새와 화장실 지린내가 진동을 할 텐데 말없는 그는 냄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뜨거운 숨을 불어넣기 바빴다. 나는 그 뜨거운 숨결에서 사랑과 애정 그리고 분노와 증오 잔혹한 환멸이 공존하는 것을 느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악마와 결탁하는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그를 먼저 앉혀놓고 내가 들어가 앉았다. 물의 온도는 피로를 날려줄 만큼 적당했다. 두 남녀의 부피 때문인지 욕조의 물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범람했다. 나는 오랜 시간 누워있던 그의 몸을 구석구석 씻겨내기 시작했다. 향긋한 비누거품과 기분 좋은 온도가 그간의 피로함을 모두 씻겨주었다. 욕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마른 수건으로 그와 내 몸을 잘 닦아낸 뒤에 옷을 갈아입히고 그의 머리칼을 말려주었다. 목욕을 마친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을 때 그는 내 목덜미를 한번 더 깨물었다. 이번에는 꽤 세게 깨무는지 잇자국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점점 세게 내 목을 깨물었다. 목덜미에는 그의 침이 흘러내렸다. 나는 알몸으로 그를 안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발 놓지 마. 나를 깨물어 죽여줘. 내 정맥과 동맥을 당신의 입으로 끊어줘. 그래서 내 몸에 검고 더러운 피를 모두 뽑아내줘. 당신이 나를 죽이고 싶다면 제발 그렇게 죽여줘.>

그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내 목덜미를 물고 있던 그 턱의 힘이 점점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방을 나와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소주를 따서 병째로 마셨다. 그리고 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촘촘하게 파인 잇자국 위로 축축하게 식어버린 그의 침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 끝에 후덥지근하고 매캐한 알코올 향이 진하게 맴돌았다. 소파에 앉기 위해 뒤돌아섰을 때 노인네는 세월이 깊게 파놓은 고랑 같은 주름들 사이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갈변된 내 알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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