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능을 마친 아이들을 축하하듯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었다. 단단하게 결정을 이루지 못한 눈은 피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도저히 거머쥘 수 없는 행복이라는 신기루처럼. 막연한 희망과 헛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은 모두 서설瑞雪일 것이다. 나는 그런 소외된 사람들의 평온을 바라며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옛 가수의 노랫말처럼 하얀 눈이 하늘 높이 자꾸만 올라갔다. 투명한 눈송이들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로 빨려 올라가듯이 보였다. 내 작은 바람은 신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서로운 징조 따위는 지상에 사는 너희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며 신이 도로 빼앗아가는 것 같았다. 아마 신이 가진 은밀한 취미가 있다면 줬다 뺏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 앞까지 내주었다가 휙 돌아서는 행복이나 희망, 기대처럼. 그래야 고통 속에서 불행에 절여진 채 오래오래 신을 믿으며 살 수 있을 테니까. 역사 앞에 자리 잡은 로또명당으로 유명해진 복권집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턱을 괴고 그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불행에 긴 시간 동안 담가져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복권 한 장씩 사서 자기는 꼭 당첨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게 밀당하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희망이라는 무책임한 단어가 아닌가 하고. 계절이 더 짙어진 줄도 모르고 가을외투를 입고 나온 나를 꾸짖듯이 날을 벼린 바람이 목덜미를 할퀴었다. 오소소 돋는 소름은 커피를 사 온 덕영과 태랑 덕분에 금방 진정되었다. 내게 팔짱을 끼는 둘 덕분에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테이크 아웃 잔의 뚜껑을 열자마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샷추가를 얼마나 한 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피는 진하게 보였다. 끓어오르는 7월의 콜타르 같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덕영이 말했다.
<언니. 이태원으로 옮기자니까. 부천역은 이제 재미가 없어. 이태원 가면 우릴 반겨줄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곳은 자유와 해방만이 존재하는 낙원이니까. 돈 많은 오빠들도 많다구.>
태랑이 덕영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언니 이태원 싫어해.>
<왜? 거기 원수라도 있는 거야?>
<너는 참, 이태원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그것도 모르니.>
<언니. 타박만 하지 말고 설명이나 좀 해보슈. 이태원이 이방인이 많아서 이태원 아니야.>
<배나무가 많아서 이태원이지. 큭큭.>
<이 언니는 무슨 배나무타령이야.>
<미강언니 말이 맞어. 예전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이태원에 주둔을 하게 됐는데 다 피난 가고 남은 여자들은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라는 절의 비구니들 뿐이었어. 근데 일본 놈의 새끼들이 그 여승들을 다 겁탈하고 절까지 불 질러버린 거야.>
<와, 진짜 쓰레기 새끼들이구나.>
<근데 문제는 이 비구니들이 임신을 해서 아이들을 낳게 된 거지.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 여자들은 애들을 키워야 할 거 아니야. 절은 불타서 사라졌지. 여자들은 아이들을 보살펴야지. 그래서 거기에 보육원을 지은 거야.>
<아, 그 다른 민족의 피가 섞여서. 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태원으로 불리는구나.>
<끝이 아니야. 국가는 전쟁이 끝나고 전쟁 중에 겁탈을 당한 여자들이랑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사회적인 문제로 삼기 시작했어.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들이랑 항복하고 귀화한 일본인들을 그곳에 몰아서 아예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묶어버린 거야. 자국민들에게 또 몹쓸 짓을 또 한 거지. 두 번 죽인거라구.>
<근데 배나무 얘기는 뭐야.>
<그 후에 왕이 바뀌었는데 한자식 지명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다를 이 자에 아이 벨 태 자에 둥글 원 자인데(異胎圓) 그걸 배나무가 많은 지역이라고 구라를 쳐서 억지로 바꾼 거야. 억지도 아니지 왕의 명이니까. 지금은 배나무 이 자에 클 태 자에 집 원 자를 쓰니까. (梨泰院) 그때 그 사람들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하니. 팔자에도 없는 아이 키워야지. 자국민인데 이방인으로 살아야지. 그것도 모자라 동네 이름도 바꿔버리고.>
<그런 역사가 있고 유서가 깊은 동네인데 미강언니는 왜 안 간다는 거야. 좋기만 하구만.>
<이방인이 싫어. 거기에 가면 왠지 내가 이방인이 된 거 같아.>
<지금은 배나무라며?>
<배나무도 싫어. 난 복숭아가 좋아.>
<아, 그래서 복사골 부천에 터를 잡으셨다? 난 부천 싫어. 조 씨 집안 집성촌이잖아 우리 아빠 조 씨야.>
덕영의 덧없는 일갈이 귀여운지 태랑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배보다는 복숭아가 더 맛있지. 물도 많고. 얘. 여자는 자고로 물이 많아야 돼. 알지도 못하는 게.>
<태랑 언니. 언니 복숭아 좀 많이 자셔야겠다. 퍼석하고 버석거리는 게 남자들이 어찌 물겠어. 커피 그만마시구 생수 드셔. 자.>
<야이. 저 년이 또 성질 돋구네.>
그들과의 대화는 여지없이 삶의 비늘을 또 한 꺼풀 벗겨낸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눈이 그쳤고 어느 무명의 여가수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쇳조각 같은 작은 마이크에서는 앤 머레이의 유 니디드 미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감미로운 여가수의 노랫말을 들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탁한 하늘을 지워내고 맑게 개인 밤하늘에 유난히도 별들이 빛났다. 고개를 들어 올린 덕영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오늘따라 별들이 밝네.>
<너도 별이야. 태랑이도 별이고. 나도 별이고.>
<뭐야. 언니 청승맞게. 멘트가 노인네 같애.>
<너 사람몸에 두 번째로 많은 게 뭔지 알아? 탄소야. 탄소는 항성이 폭발할 때만 생성되는 거야. 그러니까 생명엔 모두 별조각이 들어가 있는 거.>
<과연 신이 우리에게도 별의 조각을 심어주었을까? 실수로 넣었다면 모를까.>
<그렇게 믿어야지 뭐 어쩌겠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신의 자녀라고 믿을 때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라고 믿어야지.>
<우리는 별이 아니라 에테르 아닐까? 원래는 우주를 구성하는 별개의 순수한 원소로 불렸지만 실험을 통해서 존재를 부정당해 폐지된 물질 말이야. 하긴 신의 자녀든 별의 자녀든 알 게 뭐야. 어쨌든 아무리 부정당해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잖아.>
<나는 미강 언니 말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 에테르인지 뭔지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아. 나도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덕영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려다 사라진다. 버스킹 하는 여가수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우리 셋은 공복감을 느꼈다. 분식을 먹으러 가자는 덕영의 말에 셋의 발걸음은 시장 안 골목을 향하기 시작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날생선의 비린냄새와 돼지 내장과 족발을 삶아낸 누린내, 아직 흙이 묻어있는 여러 가지 채소들의 알싸한 냄새가 한데 뒤섞여 정겨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 골목 중간쯤에 위치한 분식집 앞에 멈춰 떡볶이에 무쳐먹을 튀김들을 골랐다. 빨간 떡볶이에 버무려진 김말이 튀김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태랑이 먼 곳을 응시한 채 말했다. 태랑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는 철 지난 트로트 메들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요새도 저런 사람들이 있네. 저 고무 타이어 끌고 다니는 사람 말이야.>
<뭔데. 어디. 아, 저 하반신에 고무 씌우고 시장바닥 기어 다니는 사람.>
<어휴. 난 저런 사람들 보면 딱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 근데 어쩌겠어. 몸이 저래도 어쨌든 살아내야만 하잖아.>
누군가 등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엄마를 간병해 준 조선족 여자 순화였다. 각진 얼굴에 단발머리인 그녀의 행색은 엄마를 간병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 행실이 검소했던 그녀는 간병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점령하기 전 고향에 있는 친구의 연락을 받은 그녀는 마스크 공장에 무작정 찾아가 한 장에 100 원하던 일회용 마스크를 전 재산을 털어 모조리 구입을 해놓았다. 코로나 발병 후 마스크 품귀현상이 벌어지자 인터넷으로 마스크를 팔기 시작했다. 한 장에 100원에 산 마스크를 1000원에 팔다가 나중에는 한 장에 4000원까지 받고 팔았다. 전 재산 몇 천만 원으로 몇 억을 벌어들인 셈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입으로 부천에 자리를 잡은 뒤 환전소를 차리고 중국인들 비자를 대리해 주는 사무실을 차리고 건장한 중국동포들을 데리고 와서 인력 사무소까지 차려 돈을 벌었다. 그녀의 자본과 같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 시스템을 구축했고 순화는 이방인이지만 부천에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순화를 알게 된 건 병원 간호사들의 추천이었다. 간병일을 잘하는 조선족이 있는데 한번 써보지 않으시겠냐고. 이쪽에선 일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순화는 분명히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하게 간병일만큼은 그만두질 않았다.
<저희 어머니랑 동생도 오랫동안 아팠슴다. 그래서 누워있는 사람들만 보면 마음이 편치 않고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질 않아요.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왠지 두 사람이 받아야 할 복이 모두 나에게로만 온 거 같아서 늘 마음이 불편함다.>
순화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말했다. 병실에서 처음 본 순화는 올곧고 착실한 구석이 보였고 생을 조금이라도 등지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려는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순화는 투병 중인 엄마를 정성껏 간병해 주었고 순화 덕분에 투병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환자의 가족이 느낄 수 있는 절망과 암담함의 흐름에서 그나마 비켜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순화가 반가웠는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뭐 하심까. 방송 계속 하심까.>
<아니, 오늘은 쉬려고 좋은 날이잖아. 어떻게 지냈어? 연락을 한다는 게 깜박했네. 나중에 방송할 때 순화씨 부를 테니까 올래?>
<아. 전 일없슴다. 아이 해도 됨다. 옆에 계신 어여쁜 녀인들과 함께하시라요.>
덕영과 태랑이 조선족 사투리를 듣고서는 신기하듯 쳐다보았다.
<언니 누구야? 아니 이런 귀한 콘텐츠를 언니만 알고 있었던 거야? 섭섭하다.>
<아. 미강 씨 어머니 간병했슴다. 뭐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슴다.>
태랑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는요. 무슨. 일 없슴다.>
웃고 있는 순화의 얼굴 너머로 누군가 우리 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얇은 차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목이 잘린 꽃처럼 그 여자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날씨가 꽤 추운데. 그녀가 우리 쪽을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잘린 줄기 같은 가냘픈 몸으로 차가운 공기를 헤집으며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가까워졌다. 꿈이다. 이것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네가 내 눈에 들어왔으니까. 꿈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바로 너. 물기가 말라버린 메마른 가슴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6.
<거기 가만히 있으라이. 왜 왔네. 거 아무렇게나 돌아댕기면 길 잃는다 그래지 않안?>
순화는 우리에게 다가온 여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여자. 오랫동안 잃고 지냈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중력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는지 내 두 다리는 붕 떠있는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조우한 너와 나. 또다시 내가 자리 잡은 곳에 이방인처럼 들어온 너.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나에게 친밀한 이방인.
<혹시. 권미강? 얘. 진짜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니. 나야. 조은애.>
<둘이 아는 사입네까?>
<응, 고등학교 단짝.>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나와 은애. 순화. 그리고 덕영과 태랑까지. 우리 다섯은 어린 시절 고무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작은 반원을 이루고 서있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본 순화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기 소사동 꼭대기에 마리아의 집이라고 있슴다. 은애 양은 지금 거기서 보호받고 있에요. 나는 그곳에서 보호 중인 아들을 관리하고 있슴다. 오늘은 장을 보러 나오는 날인데. 은애가 같이 나가자고 하도 성화를 해서리. 보안요원들이랑 같이 나왔슴다.>
덕영의 콧소리가 말을 비집고 들어왔다.
<엥? 요양원에 무슨 보안요원? 거기는 아무나 못 들어가나 봐요?>
<그 보안 요원이라는 거이. 그.>
순화의 말끝이 흐려지는 찰나 검은색 승합차가 몇 미터 앞에서 창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멀리서 보아도 꽤 건장한 체구의 남자였다.
<이제 가보겠슴다.>
순화는 손짓을 보고서는 은애의 팔을 붙잡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취가 내 주의를 끌었다. 순화와 은애가 떠난 자리에 들뜬 정적이 감돌았다. 은애와 순화는 같이 있다. 은애를 다시 보려면 순화에게 연락을 하면 될 것이었다. 급할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등을 보인 불안은 내 기억 속으로 침잠하며 깊숙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기억의 수면 위로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물 위에 떠오른 익사체처럼 감추어야 할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론 사악하니까. 진실이 아닌 진실과 거짓이 아닌 거짓 상처가 아닌 상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의 환기는 몸살 기운보다 더 추위에 지치게 만들었다. 내가 음울한 반추를 하는 동안 태랑과 덕영이 붕어빵을 사 왔다. 갓 구운 붕어빵 냄새는 먼 추억의 달콤한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각들을 하나 둘 삼켰다. 거리에서 의미 없는 배회를 뒤로한 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에 홀로 주저앉아 핸드폰 케이스에 끼워두었던 편지를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조우는 늪처럼 고여있던 시간에 자그마한 물길을 만들어냈다.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것처럼 내 몸속 깊은 곳에 뿌리내린 무언가가 조금씩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K에게.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선 꽤나 버거운 일인 것 같아. 진심이라는 건 다치기 쉽게 꺼내놓은 맨살 같은 거니까. 그래서 나는 여태 겁쟁이로 살아왔어. 진심을 꺼내지 못하고 감추면서 말이야. 진심을 겉으로 꺼내는 순간 나를 상처 입혀도 된다는 권리를 상대에게 넘겨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내 진심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룬다고 해도 그것을 망가트릴 수 있는 권리는 내가 아닌 상대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에게는 이렇게 내 진심을 꺼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면 편지라는 거는 너무 좋지 않니. 진심이 없으면 이 작은 공간도 채우기 어렵잖아. 그날 너의 다락방에서 함께 잤을 때 나는 이 세계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기분이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내 손을 잡고 혼돈으로 가득한 곳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 같았어. 내가 그렇게 느낀 건 너의 숨결이 나를 안온하게 진정시켜 주었기 때문일 거야. 다락방은 유난히 아늑하게 보였어. 한 방에서 잔다는 건 좀 신비한 일이기도 해. 네가 잠에 들었을 때 네 날숨을 내가 마시기도 하고 내 날숨을 네가 마시기도 하는 거니까. 호흡과 냄새를 공유하는 거지. 그리고 서로의 비밀까지도. 그날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려던 걸 우린 함께 목격했지. 너희 엄마와 우리 아빠가 그 좁은 방 안에서 서로를 탐하려고 하던 모습에 우리는 경악했어.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을 우린 보고 말아 버린 거야. 우리가 다락방에서 몰래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지 않았다면 두 남녀는 육체가 주는 매혹적인 감미 속에서 긴 시간 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겠지. 우리가 엿보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다행히도 두 남녀는 우리 앞에서 헐벗지는 않았어. 나는 우리 아빠를 너무나 미워하거든. 경멸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런 사람의 헐벗은 몸을 나는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아. 그날 아빠의 맨살을 보고 경탄하는 음성을 들었다면 나는 지옥으로 떨어졌을지도 몰라. 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를 살려준 거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두 남녀가 떠나고 우리는 다락방에 나란히 누웠지. 너무 비좁은 탓에 무릎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얼마나 있었을까. 목이 마르다는 너의 말에 나는 가방에서 무화과를 꺼냈어. 그리고 반쯤 돌아 누워 너를 올려다보았어. 그때 보았지. 너의 그 두 다리를. 나를 현혹시킨 너의 다리. 무방비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창백한 너의 두 다리. 그 위에 무수한 모기 물린 자국과 크고 작은 생채기와 멍자국. 생기 있어 보이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가느다란 두 다리. 내 가슴속에서는 시샘과 경탄이 동시에 꿈틀댔어. 그리고 생각했지. 오늘은 꿈만 같다고. 오래된 내 꿈은 타락과도 흡사한 탐미에 빠져드는 것. 내가 한 입 베어문 무화과의 잇자국에 네 입술이 닿았을 때 나는 낯선 친밀감을 느꼈어. 동시에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 우리의 떨리는 손끝이 서로의 젖은 입술을 지나고 목덜미를 스치고 가슴골에 머물렀을 때. 하아, 옅은 숨이 새어 나왔어. 부드럽고 감미로운 떨림. 따듯한 오월의 봄바람을 맞으며 잠에 곯아떨어질 때의 감미로운 경련 같은 것. 바르르 떨리는 몸의 휘파람 소리. 그것은 해 질 무렵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길고 긴 라단조의 휘파람 소리처럼 아득하게 귀전을 맴돌았지. 미세한 떨림을 동반한 옅은 숨소리에 우리는 서로의 살을 맞대고 체온을 느끼며 호흡을 함께하기 시작했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우리의 맞잡은 두 손. 보드라운 모래밭을 걷는 기분이었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내 몸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어. 내 귓가에는 너의 뜨거운 숨결이 옮겨오기 시작했지. 하. 봉인이 풀리는 소리. 하. 우린 서로 동시에 같은 숨을 내뱉었어. 네 귓가에도 나의 숨결이 옮겨 붙었지. 하.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닫혀있던 마음의 봉인이 풀린 소리였어. 격렬하게 요동치는 너와 나의 맥박. 그 손이 움직이면 내 손이 움찔거려 어찌할 줄 몰랐고 그 손이 가만히 있으면 나는 침이 넘어갔어. 그 손이 깍지를 끼면 발바닥이 간지러웠고 그 손이 가까워지면 숨이 막혔어. 아련한 허밍으로 새어 나오는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내 입술을 벌리고 손가락을 벌리고 샅으로 들어오던 그 첫 순간. 찌르르 감아 오르던 전류를 나는 잊을 수 있을까. 저절로 새어 나오던 그 옅은 한숨. 풀무질 같은 소리. 멀고도 선명한 소리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랫배가 저릿하며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아. 내 몸속에 이렇게 신비스러운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 어김없이 움찔거리는 서로의 몸의 가장 깊숙한 그곳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대보았을 때 우리의 눈은 이렇게 말했다지. 정말 움직이고 있어. 움찔움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조금 더 안쪽으로 손끝을 넣었을 때는 촉촉하고 보드랍고 몽롱한 기분에 마취되어 우리가 있는 곳이 새벽 숲처럼 느껴졌어. 이슬을 머금은 꽃봉오리가 터지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너의 가슴팍에서는 가늘고 여린 이파리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지. 나는 너의 수풀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고 내 귓가에는 아련한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지. 너의 입에서는 복숭아 잼 같은 달콤한 침이 흘러나왔어. 우리는 촉촉이 젖은 채 발열하는 서로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고 내 입에서는 달게 익어버린 침이 한가득 고였지. 그때 내 몸에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았어. 생크림처럼 아련하고, 무화과의 과육처럼 달콤하고 촉촉한 내 몸의 축제. 지금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날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한 날이라지만, 내 몸에 새겨지는 기록은 한여름 축제의 밤이야. 내 몸에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은 배꼽을 지나 명치뼈를 짓누르고 목구멍까지 단번에 치올라온다. 하. 네 생각이 들떄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해. 그리고 몸이 바르르 떨리며 웃음이 새어 나온다. 히히. 이건 너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나도 너에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너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쓸 수 있을까.
그날 은애의 손이 미끄러진 건 단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삐뚤어진 우리에게 신이 내려줄 첫 번째 형벌의 전조였을까.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은애는 그 편지를 내 책상으로 던지려다 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교실 한복판에 뿌려버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엄마는 늙은 암고양이처럼 천천히 걸어가 허리를 숙여 편지를 주웠다. 딱지모양으로 접힌 분홍색 편지지를 펼쳐서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 엄마의 눈은 교실 창문으로 비추는 겨울 햇빛으로 물들어 낯선 이방인처럼 보였다. 엄마가 편지를 눈으로 좇기 시작한 순간 교실의 허공을 부유하는 작은 먼지 한 톨 조차 운행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적막을 깬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은애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첫 문장 좋아. 시 같은데. 조은애. 앞으로 나와. 반 친구들 앞에서 낭독해 보자.>
그때 은애는 차라리 교실밖으로 뛰어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엄마에게 선생님이 뭔데 남의 편지를 읽어보느냐고 따지기라도 했어야 할까. 은애가 굳게 입을 다문 차가운 법랑 칠판 앞에 홀로 서서 편지를 다 읽었을 때쯤 교실을 뛰쳐나간 건 그 애가 아니라 나였다. 엄마의 손에 쥐어진 하얗고 두꺼운 분필이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황급하게 벗어났다. 나는 학교를 벗어나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학교 앞 논두렁을 지나 녹슨 푯말이 붙어있는 정류장을 지나 집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외투를 챙기지 않아 젖은 셔츠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한기가 몰려왔다. 집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바닥에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기억의 암층은 또다시 하나 둘 퇴적물을 쌓아가고 있었다. 머릿속을 모조리 비워내고 싶었다.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의식은 기억의 암층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까마득한 어둠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날 아침 교실 칠판에는 은애를 겨냥하는 날 선 비판의 말들과 조롱의 언어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은애는 한동안 등교하지 않았다. 며칠 뒤 핏기 없는 얼굴로 등장한 은애의 손목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은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볼 뿐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점심시간에 은애는 학교 옥상에서 투신시도를 했다. 다행히도 화단에 여러 그루 심어져 있는 측백나무 위로 떨어져서 목숨은 위태롭지 않았으나 고관절 골절로 인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나는 만신창이의 은애를 볼 자신이 없었다. 밥을 먹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귓가에서는 편지를 읽던 은애의 음성이 잘게 쪼개져 자장가처럼 들리다가 때로는 무곡처럼 들려왔다. 그 언어의 음률이 현기증으로 이어져 실신했을 때 병원 응급실에서 엄마가 말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모두 한 글자로 되어있다고. <몸, 피, 눈, 코, 입, 뼈, 손, 발, 간, 장, 혀, 침, 폐, 젖, 볼, 턱, 숨, 밥,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나, 너, 벗, 꿈, 삶. 그러니까 이제 밥 먹자.>
나는 그때 생각했다. 엄마. 난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제일 소중한 것들을 잃었어요. 나, 너, 벗, 꿈, 그리고 삶까지.
졸업앨범을 나눠준 어느 추운 날 하늘에서는 눈송이들이 흩날렸다. 나는 창 밖에 시선을 두고 새하얗게 눈이 덮인 하얀 운동장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눈꽃들이 흩날리는 바깥풍경과 달리 교실에서는 어느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들을 끊임없이 적느라 딱딱하고 경직된 소리만 들려왔다. 하얀 색채에 무딘 걸음이 찍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필통에는 몇 자루의 펜과 무엇도 자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무딘 날을 가진 작은 가위가 들어있었다. 나는 가위로 졸업앨범에 새겨진 내 사진을 도려냈다. 그것을 손에 쥐고 나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턱끝까지 숨이 차오른 나는 다리를 절룩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가위로 도려낸 내 사진을 건네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의 입은 투명한 입김만 토해내고 있었다. 귓가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 위에 소복이 눈이 쌓여갔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