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수년 동안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어떡해서든 그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나의 그릇된 욕망은 결코 해소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삶은 극단적일 만큼 권태와 고통으로만 귀결될 뿐이었으며, 눈부시게 빛나던 나의 청춘의 시간들은 어느덧 조각조각 부서지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져 버리는 유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접어들자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무섭게 이글거리는 불꽃을 감춘 채 겉으로는 평온한 휴화산처럼 위태로운 고요함 속에서 오직 술의 힘만을 빌려 세월의 등을 떠밀기만 했다.
삶에서 비단 가치 있는 걸 찾아내서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분명하고 옳은 것이라고 믿어왔던 과거는 마흔이 돼서야 빛바랜 사진처럼 당시의 명확한 색을 잃어버리며 조금씩 그 형태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애석하지만 분명한 것이 전부 다 옳은 것이 아니다 라는 배반의 논리를 지금의 나이가 돼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30대에 내가 가장 많이 생각은 왜 살아야 하는가였다.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할 바에야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책 속의 명언들도 현실에 크게 이익 인적은 없었다. 일을 망치고 나서야 겨우 그런 말이 있었는데, 하며 회한을 키우는데나 쓸모가 있었달까?
그렇게 권태와 고통 사이에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을 무렵 문득 이제 죽어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가로놓인 침묵의 심연이 추를 기울이며 나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다. 그대로 죽어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어차피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떠나는 건 딱히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희구하는 건 세월이라는 표랑을 끝내고 마음 편히 쉬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여일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39살의 나는 권태와 고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하다 그만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어둠으로 뒤엉킨 바닥은 막상 떨어져 보니 딱히 큰 공포감을 안겨주진 않았다.
그냥 제힘으로 일어나서 툭툭 몸을 털어내고 다시 외줄타기를 하러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올라서서 외줄타기를 하려고 줄을 밟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삶 자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 있는 것이다. 타인의 형태가 멋지다고 해서 똑같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형태가 형편없다고 폄훼할 것도 아니다. 타인에게 가치 있는 것이 나에게 가치 있을 것이라는 법도 없거니와 내게 가치 있는 것이 타인에게 가치 있을 것이라는 망상도 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세상엔 모두 각자에게 어울리는 형태와 모양이 있는 것이다.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모양의 톱니바퀴만으로는 시계가 돌아갈 수 없듯이 각자의 형태로 최선을 다해서 존재할 때 그제서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형태는 지금으로써는 아득히 멀고 희미하겠지만 암실 속에서 사진을 인화하듯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선명하게 그 색을 띄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에게 있어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삶 자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내가 하는 거라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맞이하고 살아 숨 쉬는 걸 만끽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선명한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건 없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더 이상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만 고집하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이다.난 더 이상 주인공을 바라지 않는다.
걸작인 영화에서는 가끔 주인공보다 조연이 빛나는 법도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됐든 조연이 됐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살아가기만 한다면 시간이 지나서 걸작이든 명작이든 수작이든 될지언정 결코 망작은 되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