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잊혀지는 게 아니라 헝클어지는 것

by 보림월

미적지근한 여름비가 내리는 저녁 신촌역 오거리를 지나는 찰나 차 창밖으로 A가 보인다. 예상치 못했던 소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당황하며 곤란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는데, A는 석류알 같은 치아를 보이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차 안에서 나는 혼잣말을 했다. "나랑 있을 땐 저렇게 안 웃었는데." 비바람에 우산처럼 기억이 뒤집힌건지 정말로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A의 미소가 그 때의 우리를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다. 잊혀진 때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의 기억은 잘 감긴 실타래의 실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누군가 말했다 기억은 잊혀지는게 아니라 헝클어 지는거라고, 몸의 기억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마음보다 정직하니까.

짙게 선팅 된 유리창 때문에 차 안에 내 모습이 보일 리는 없겠지만, A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다가 들고 있던 텀블러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리 사이로 커피가 흘러내렸다. 커피는 내 크림색 면바지에 몇 개의 얼룩을 남겼다. 하지만 티슈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신호 대기 중인 짧은 시간 동안 A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나는 한동안 멀어져 있던 그리운 풍경을 오랜만에 바라보는 것처럼 침묵 속에서 A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신호가 바뀌자 영원할 것 같던 정적이 뒤 차의 경적소리에 깨져버렸다. 허공을 떠다니는 침묵의 파편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다. 그렇게 A의 미소는 여름 저녁의 엷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나서야 커피에 얼룩진 바지가 눈에 보였다.

몇 개의 얼룩은 때로 짙고 때로는 옅게 퍼져나간 그 얼룩은 꼭 나를 닮아있었다. 균일하지 않고 순간순간 농담濃淡을 간직한 채 내비치는 내 마음이 이 얼룩처럼 보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 안 가득 메워진 묵직한 공기에서 튀어나온 가시들이 손가락으로 느껴졌다. 퇴근시간 교통정체 때문에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어 보인다. 뭉친 어깨 때문에 기지개를 켜는데 룸미러에 고개를 뻗은 빈 껍질이 비친다. 그 껍데기의 눈빛은 사람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떠나버린 뒤의 방 같았다. 뭔가 나름의 중요한 것이 내 안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해 있었다. 거기에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였고, 그리움의 온기가 아닌 기억의 정체였다. 어둠 속에서도 가르마 사이로 흰머리가 자라는 게 보인다. 한 가닥 머리칼의 순수한 흰빛은 내게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표백漂白을 일러주고 있었다.


#단편소설#나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