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남겨준 유산
엄마는 6남매 중 넷째 딸이다.
엄마가 태어나기 전 외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3명의 자식들과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외할머니는 생계를 유지하기 바빴다.
엄마가 태어나자 외할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매일같이 밖으로 나섰다.
엄마는 자신의 부모가 아닌 자신의 형제들 손에 키워졌다.
엄마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혼자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자.
가족들은 각자의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자, 자신의 생계를 직접 해결해야 했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엄마는 가난이 죽도록 싫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과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녀가 어린 소녀로서 꿈꿀 수 있는 작은 미래조차 바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엄마는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배운 게 없어서 쉽게 취직이 안 되니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다 양장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매일같이 반복되는 손님들의 갑질에 이골이 났고,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사장으로부터 금방 해고되고 말았다.
갈 곳이 없어진 엄마는 길거리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어느 건물 지하로 향했다.
다방이었다.
당시의 다방은 지금처럼 퇴폐적인 이미지가 아닌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고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지금으로 따지자면 동네 커피숍과 비슷한 느낌의 점포였다.
숙식이 제공된다는 점에서 현재 오갈 데가 없는 엄마에게 최적의 일자리였다.
엄마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서빙도 주방에 설거지도 한가한 손님들의 말동무도 해주면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엄마는 그곳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5형제 중 막내다.
그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6.25 피난을 겪었고
당시 시류 때문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 돈이 없어 학교에서 늘 놀림을 당했다.
아빠가 성인이 되자 자신의 둘째형은 작은 점포를 사서 정육점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에 운때가 잘 들어맞아 그 정육점의 점포의 땅이 재개발 대상이 되는 바람에
나라에서 큰 보상금을 얻고 나오게 되어서 벼락부자가 되었다.
둘째 큰아버지는 아빠에게 네가 결혼만 하면 장사라도 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면서
신붓감을 데려오라고 했다.
당시 아빠는 자신의 친구들과 동네 방범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량이었다.
하지만 둘째형이 자신에게 물려줄 재산이 있다면서 동네에서 큰소리를 치고 다녔던 모양이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지독한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아빠의 겉모습과 사실 확인도 안 된 유언비어를 믿어버린 채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둘은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도피하고자
무작정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아닌 도피로 맺어진 결혼이었다.
식을 마저 올리지도 못한 채 그들의 신혼살림은 둘째 큰아버지의 저택에 딸린 사랑방에 차려졌다.
큰아버지는 돈이 없는 아빠를 위한 배려라고 말했다.
큰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3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리자 둘째 큰아버지는 몰래 자신의 정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 엄마에게 밥을 차리라고 시키는 둥 가사도우미를 부리듯 엄마를 대했다.
아빠는 그 와중에 자신이 형이 정말 재산을 물려줄 거라 철썩 같이 믿고 있는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가장의 의무를 저버리고 친구들과 밖으로 쏘아 다니기 일쑤였다. 그 당시 엄마 뱃속엔 내가 들어있었는데, 태어날 자식을 위해 엄마는 홀로 리어카를 끌고 개천 뚝빵에서 포장마차를 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취객들과 싸워야 했고
자신의 아내가 술장사를 하며 취객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못마땅한 아빠는 힘든 밤 장사를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매일같이 짜증을 내고 몇 푼 안 되는 매출을 엄마한테서 뺏어가 친구들과 유흥에 탕진했다.
차도 없고 대중교통도 마땅치 않던 당시 엄마는
남편 없이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이끌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지병을 얻었다.
자신의 아내가 아픈지도 모르고 아빠는 엄마가 서랍에 숨겨놨던 몇천 원을 들고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엄마는 저금통에 남아있는 몇십 원으로 안성탕면 하나를 사서 3일 동안 먹었다고 한다.
엄마는 아직도 라면을 안 먹는다.
몇 달 후 내가 태어났다.
난생처음 자신의 핏줄을 가진 붉은 핏덩이를 마주한 30대의 남성은 불현듯 자신이 가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트럭을 사서 건축자재를 옮기고 철거된 고물들을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둘째아버지 밑에서 벗어나 판자촌 월세집으로 세 식구가 살게 된다.
둘째 큰아버지는 그때까지도 묶여있는 자신의 돈이 있는데 그것만 해결되면 아빠에게 한 밑천 대줄 거라 호언장담을 했다. 아빠는 자신의 형이 하는 말만 믿고 큰 도전이나 목표 없이 삼시세끼 굶지 않을 정도의 돈만 벌어왔다. 자신의 역량을 키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도적인 삶은 그의 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아기새가 어미새를 쳐다보듯 오로지 둘째 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훗 날 둘째형이 자신에게 물려줄 재산만을 생각한 채 하루하루 안일하게 살았다.
그 판자촌 집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생이 되니 책상도 있어야 했고 여러 가지 세간들을 다시 꾸려야 했다.
그리고 판자촌 집은 학교와 멀어서 통학이 힘들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살기가 힘들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큰아버지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돈이 없었다. 당시 엄마 아빠는 직업이 불분명해 은행에서 대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큰아버지 소유의 건물인 다세대 주택 옥상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옥상 집에서 우리 가족은 20년 정도 살았다. 방 두 개짜리 옥탑방이었다.
내가 13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저녁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큰아버지가 올라오시더니 아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는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빠가 큰아버지에게 언제쯤 자신에게 밑천을 대줄 것이냐라고 채근을 하던 중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큰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동네 지인들에게 하소연을 했던 게 큰아버지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큰아버지는 왜 자기를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올려놓냐며 아빠를 손찌검한 것이다.
아빠는 뺨을 맞고 큰아버지의 권위 앞에 굴종되어 자식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방문을 얼른 닫았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때의 일을 못 본 체 했다.
딱히 말할 이유도 없었고 당신의 아픔을 굳이 까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아빠가 받은 상처가 아빠를 평생 동안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빠는 한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집에 누워만 있었다.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가끔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가거나 외출을 하고 조금이라도 늦은 시간에 들어오면 집안 살림을 다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와 동생에게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면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이라는 소리를 내뱉으며 원망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집안의 불화는 그 빈도수가 잦아졌고 그 불화가 남긴 불꽃은 고스란히 나와 동생에게 전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동생을 부정적인 언어만 듣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말과 행동에는 항상 자신감이 결여되어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넌 못해!", "넌 안돼!", "그러면 그렇지." 같은 존재의 부정이 내포된
가능성의 부재와 관련된 언어들만 들어온 터라 내 무의식엔 온통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당신들처럼 주도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모종의 이유 때문에 망가진 삶이라고 그 사유에 대해서 어떤 원인을 탓하면 참 좋으련만,
내 분노의 화살표는 항상 스스로를 향해 있었다.
모든 원인은 내 존재 때문이다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고 앞으로 나갈 힘조차 사라져 버렸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IMF가 터졌다. 당시 아빠는 택시회사에 취직했다.
IMF라는 시류에 휩쓸려 사회적으로 폭력적인 풍조가 일었다.
아빠는 야간 택시를 하면서 늦은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자신이 겪은 수모는 분노를 원동력 삼아 곧장 가정폭력으로 치환됐다.
아빠는 그래도 택시가 잘 맞았는지 어느새 개인택시를 마련했다.
엄마의 신용카드로 말이다. 그것 때문에 엄마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23살 때 아빠는 택시를 처분했다.
아빠는 불면증과 우울증 약간의 조현병을 동반한 정신 착란 증세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중증의 당뇨로 인해 기존의 무기력에 더 극심한 무기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신용불량자를 벗어나고자 꽤 오랜 시간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 결과로 어깨 연골은 재활치료 중이며 고지혈증 약을 먹고 있다. 다행히 지금은 신용카드가 재발급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내 가족의 서사를 쓰고 싶어서였다.
어떻게 나의 가족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내 부모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그들에게서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그 유전자는 내 삶에서 얼마큼 유효하고 실효성을 띄는지,
그게 궁금해서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와 이모에게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자라왔고 내가 있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체적으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 아빠를 싫어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미명은 내 발목을 붙잡았고 그 미명 때문에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들을 미워하지 못해 점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자기혐오는 어느새 집채만 하게 커져있었고 내 삶을 송두리 째 흔드는 중이었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죽도록 싫어했던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이모에게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평생에 걸쳐 미워했던 그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 나를 괴롭혔던 질문인 '나는 왜 나를 미워하는가?'에 대한 해답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마흔 살을 앞둔 지금의 내 삶은 그 전보다 생동감이 넘친다.
전에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다.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상이 주는 고통 때문에 삶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변함이 없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 해결책을 찾았다.
삶이 주는 고통은 결국 그만큼 내 삶의 부피를 가득 채워준다.
가득 채워진 삶은 이유 없이 살아도 가득 채워졌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이건 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