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단상

본능, 경험, 그리고 이율배반

by 보림월

어느 주말 A와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다. 각자 이런저런 그림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A가 어느 그림 앞에서 30분 동안이나 가만히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의아한 나머지 A에게 다가갔다. A가 보고 있던 그림 밑에 '사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은 하얀 캔버스 위에 여러 가지 색깔을 수없이 덧칠을 해놓고서는 작가마저도 망쳐버린 작품이라고 생각했는지 칼을 사용해 X자로 크게 캔버스를 찢어놓은 작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라면 지옥이나 환멸이라고 제목을 지었을 텐데."

평소 같으면 실없는 농담 좀 그만하라며 실소했을 A이지만, 그날따라 A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묵직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공기에는 이질감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A를 쳐다보았다. A의 붉은 뺨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고 예고도 없던 눈물이었다. 미술관의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섬광처럼 번뜩였던 한 방울의 눈물은 희미한 테두리 속에 갇힌 A의 영혼에서 마지막으로 쥐어짜 내진 무언가처럼 보였다.

"괜찮아?" 나는 물었다.

나의 물음은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한 동안 허공을 맴돌다가 이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괜찮아."

나는 조용히 A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쌌다. 그제야 A는 정신을 차린 듯 젖은 뺨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게 미소를 지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날에 피어오르는 실연기 같은 그 미소는 여느 때나 다름없는 A의 해맑고 순수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근데 어쩐지 이거 너무 서글픈 그림이야."

"클림트의 키스보다 더?"

A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막무가내로 덧칠해 놓고 찢어버린 작품이 왜 서글픈지 당시의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A가 눈물을 흘렸을 찰나의 순간, 미열을 머금고 있던 우리의 숨결을 다시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중력은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았고 덕분에 제자리걸음밖에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있자는 A의 말을 뒤로하고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거리로 나왔다. A의 머리에서 풍기는 샴푸냄새를 맡고 하얀 입김을 토하면서 손에 전해지는 체온을 서로에게 전달하며 추운 도시의 그러나 우리에겐 낯익은 거리들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렇게 순간이 계절에 새겨졌다. 그리고 시간은 자신이 늘 해오던 대로 계절의 등을 떠밀어 유보 없이 착실하게 다음 순서로 전진해 나갔다. 결국엔 A와 나는 평행선을 달릴 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설령 어딘가에 도달했더라도 그곳은 결실이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고 A와 보냈던 시간들은 어느새 내 의식의 벽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 찢어진 캔버스의 이미지 또한 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듯했다. 마치 해 질 녘 땅거미의 어둠 속으로 윤곽이 뚜렷했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다 얼마 후 나는 SNS를 하다가 그 찢어진 캔버스의 그림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은 꽤 유명한 아트 페이지에 소개되었는데. 그중 작가의 작품해설에 대한 인터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랑에 대한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사랑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캔버스를 그만 찢어버린 거라고. 그렇게 수 없이 덧칠을 계속해봤자 공허라는 구멍만 더욱 커져버려서 캔버스를 아예 찢어버렸더니 자신을 결박했던 사랑이라는 영감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고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그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당시 A가 눈물을 흘린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A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정의 무게가 내가 지니고 있던 감정보다 훨씬 더 무거울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그림을 마주한 A는 발치에 가로놓인 감정의 저울질에서 내 무게가 결코 자신의 무게를 넘지 못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걸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이 A에게 척력을 일으켜서 어느 순간 나를 밀어낸 것이다. 몇 번 접혀있던 편지를 조심스레 펴서 다시 읽고 난 후 접힌 부분 그대로 다시 접어서 손이 닿지 않는 서랍 깊숙한 곳에 편지를 넣어 두듯이 A와의 기억은 내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를 원하나 보다. 아마도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이 발 붙이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서로를 위로하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겠지. 하지만 기대는 늘 경험 앞에서 무너진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다. 결국 불완전한 우리는 어떤 것도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시간이 배양해 낸 이율배반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향감각 마저 잃어버린 채 끝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불완전한 우리는 불완전한 상태로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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