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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롱도로롱 Dec 25. 2023

23년의 크리스마스

#1


 성탄절 새벽 방학동 아파트에 불이 났다고 한다. 30대 부부가 각각 2살, 7개월 자녀를 안고 불을 피해 뛰어내렸단다. 남편은 숨지고, 아내는 어깨를 다쳤으며 아이들은 살아남았다. 이제 아내는 남편없이 두 아이를 길러내야 하고 아이들은 자신의 아비가 자신을 살리고자 죽었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도 못할 나이에 살아내야 한다. 이만한 비극은 얼마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집에서 멀지도 않으니 더욱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인류를 사랑하여 수천년째 사랑받는 신이 태어난 오늘 같은날 벌어지기엔 너무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불길 위에 서서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를 안고 난간 아래를 바라보는 가장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나였다면 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부디 당신께서 원하는 곳으로 가셨길 바란다.



#2


 20년 뒤에 나는 사십대 중반이다. 으레 결혼도 하고 초등학교쯤 다니는 자녀도 있을 나이다. 그런 집에서 크리스마스는 꽤나 경사다. 집에 트리도 하나 두고, 애들 선물은 무얼 주어야 하나 아내와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러고 싶어서라기보단 우리 아이들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추억이 없으면 슬플것 같아서 그럴것 같다. 미래 아내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자녀의 경우는 상상이 된다. 날 닮아 체구가 작고 뭔가 성격도 비슷한 남자아이일것 같다. 반에 하나씩 있는 애늙은이 기질이 있는 아이다. 아이가 잘 시간에 맞춰 대충 네이버 쇼핑같은데서 남자애들이 좋아할만한 레고 세트 같은걸 한상자 사서 침대 밑에 슬쩍 두고, 잠에서 깬 아이와 멋쩍게 인사도 하고 그런 성탄절일게다. 구색 갖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다. 어찌보면 으레 남들 하는대로 사는것을 답습하는것은 삶의 원동력이 되는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 다만 남 하는것보다 조금더 잘하려고 애써온 것이다. 결혼도 자녀양육도 자녀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도 그래서 어쩐지 답습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고등학교 교사의 경우 이맘때쯤 바쁘다. 방학을 앞두고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장점을 필사적으로 찾으며, 소설가의 능력을 가미하여 환상속의 생물을 창조해 낸다. 가끔보면 내가 쓰고 있는게 생활기록부인지 포켓몬도감인지 헷갈릴 정도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 내내 잠만 자는 아이는 "차분하고 진중한 면이 있으며, 매사 성실하며 관심 가는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 고등학교보다 대학에서의 성취가 기대되는 학생임" 같은 느낌으로 탈바꿈 시켜준다. 묘하게 짜증날 때도 있지만 생활기록부라는걸 나쁘게 써준다고 나한테 좋은 것도 없지 않은가. 난 법관도 아니고 수사관도 아니니깐 거짓이나 과장을 좀 섞는다고 나쁠것도 없다. 그런 마음인것이다. 그래도 나중에 아이가 자기 생활기록부를 봤을때, 아무쪼록 좋게 생각해주는 마음이라도 느꼈으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있을 것이다. 자신과 너무 다른 문장에 반성도 좀 하고 철이 들 수 있다면 무릎 꿇고 절도 하겠다~


https://n.news.naver.com/article/586/000007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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