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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롱도로롱 Feb 21. 2024

등산은 왜 할까?

인왕산 기행기


장기하의 '등산은 왜 할까?'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산이 많은 나라 안에,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 나고 자랐지만 산에 흥미가 없다. 어쩌면 나에겐 너무 익숙한 곳이라 굳이 오를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산에들 많이 찾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나의 부모가 그러하며, 존경하는 나의 상사님(멘토님, 스승님, 부장님, 선배님) 역시 매주 산에 갈 만큼 산행을 즐긴다. 나는 그들을 보며 '도대체 왜?'라는 생각을 했지만 같이 오르는 사람들과의 친목도모나, 운동, 자연경관 등 이유를 대충 짐작할 뿐 나도 한번 올라보자는 생각은 못했다.



겨울방학이었다. 너무 무료했고, 무료함을 달래러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으나 그것은 또한 귀찮았다. 우유부단한 외향인은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면이 있다. 그래서 갑자기 산에 올라보고 싶었다?! 상술한 상사님이 자주 말하시던 '백운대'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나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아이젠도, 등산화도 없는 초보가 백운대에 갔다간 실족사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듣고 인왕산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평일 낮에 인왕산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방학의 묘미인가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산을 올랐다. 조금만 올라도 도시가 발아래 놓였고, 의외로 힘들지는 않았다. 공기가 막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나게 조용한 것은 좋았다.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이어폰을 꽂지 않고 이렇게 걸어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되었을 바위에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어리석어보였으나, 어리석으니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지나쳤다. 정상 근처에는 눈이 녹아 질척해진 땅이 있었는데 등산화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만들어졌을 내 러닝화는 인왕산에 올 줄 알았을까? 당연히 몰랐겠지 하면서 타향살이하는 러닝화에도 감정이입을 해봤다. 



정상에는 사람이 조금 있었다. 외국인, 젊은이, 노인 등등이 있었다. 다들 그들의 일상에 자그마한 성취를 더했다는 점을 기뻐하며(내 추측이다) 사진도 찍고 음료도 마시고 하는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복궁과 아파트가 펼쳐져 있었다. 잠실 롯데 타워는 보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높게 쌓아대도 산에서 보면 점처럼 보일만큼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 년 전, 천 년 전에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땠을까? 나는 가끔 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 '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인간이 만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애초부터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저 멀리 보였을 '산' 정도가 유일하겠지 하는 생각이다.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들을 대할 때 경력이 엄청난 분들은 그들의 실력이나 흥행 성적 같은 것은 차치하고 존경을 받는다.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래퍼분들 사이에서도 소위 'og'분들은 존경을 받는다. 나는 우리가 오르는 산이 지구의 og, 대선배님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어느 동네 뒷산이어도 말이다. 우리는 500년 된 고목은 무척 대단하다고 느끼면서 수십만 년 된 바위는 돌멩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산은 어떻겠는가? 고목을 길러낸 숲보다도 한참은 선배일 것이다. 그렇기에 경외하고 존경하고, 오르는 게 아닌가 싶다.



"등산 한번 한 거 가지고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네"라고 생각했다면 정확히 맞췄다. 난 엄홍길씨도 아니고 앞으로 산에 자주 갈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0과 1은 다르지 않겠는가. 어디 지역 명소까지 가서 등산하는 것은 조금 추천하기 어렵지만 도심에 있는 산은 한번 정도 올라보면 좋을 것 같다. 무척 다른 곳에 온듯한 기분이 들며, 그것에 꽤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올라보자. 내 첫 서울 산행이 인왕산이라 다행이다. 백운대에 갔으면 지금쯤 병원에 있을지도 모르고, 힘든 산에 갔으면 헉헉대느라 이런 쓸데없는 망상을 못했을 것 같다. 당신이 약속을 굳이 잡지 않아도, 계획을 굳이 짜지 않아도 지구의 대선배님들은 늘 그곳에 있으니, 아주 충동적으로 갑작스럽게 한번 방문해 보도록 하자!


https://youtu.be/-8DtRly-Cnc?si=JHnY7CaOj6Otcf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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