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해돋이 – 여명 아래서 인상주의 빛을 밝히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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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1873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48 x 63 cm 크기로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주의의 창시자로서 빛과 순간을 그린 화가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순간의 인상을 그린다’라는 철학으로 근대 회화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이었다.


미술사에서 인상주의란 모네의 작품 제목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는 사물의 고정된 형태보다는 빛과 공기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인상을 포착하려 노력했다. 그는 하늘을 보고 하늘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물에 비춰 반사하고 흔들리는 순간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그는 그림을 실내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실외에서 자연을 직접 바라보고 그리는 ‘플레네르’ 방식을 추구했다. 자연 속의 대상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다른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즉, 모네는 사물의 본질보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는 방식에 집중한 것이다. 근대 회화가 ‘사물의 본질’보다는 ‘보는 방식’을 탐구하는 시대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할 수 있다.


모네도 초기에는 살롱에서 거부당하거나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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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살롱에 출품한 <카미유 또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Camille 또는 La Femme en robe verte)은 살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긴 했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미술계에서는 그 표현 방식과 모델의 정체성 때문에 논쟁을 일으켰다.


모네는 이 그림의 모델로 자신의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카미유를 등장시켰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실제 연인을 모델로 삼는 것이 드물었고, 특히 무명의 여성을 대형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논란이 되었다. 그는 카미유에게 에메랄드그린 드레스와 모피 재킷, 깃털 장식 모자를 씌워 당시 상류층 여성의 패션을 반영했지만, 모델이 실제 귀족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카미유의 결혼 전 동거와 혼외 출산 등의 개인사가 알려지면서 도덕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점들이 작품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주었고, 예술성과 사생활이 뒤섞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866년의 <정원의 여인들>(Femmes au jardin)은 살롱에서 거절당한 모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는 목욕하는 여인들을 야외에서 직접 빛과 색채의 변화를 반영하여 대형 캔버스에 그렸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너무 거칠고, 완성도가 낮다는 이유로 낙선 처리했다. 모네는 이 작품을 친구인 바지유(Bazille)의 이름으로 다시 제출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모네는 살롱의 보수성과 형식주의에 반발하며, 1874년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독립 전시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발표한<인상, 해돋이>가 ‘인상주의’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것이다.


모네는 파리에서 노르망디 방향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지베르니에서 43년간 거주하며 인상주의의 정수를 완성했다. 그의 집과 정원은 예술과 삶이 하나로 융합된 공간이었고, 그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그가 예술과 생활의 터전으로 지베르네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모네의 지베르네 집은 2층 슬레이트 지붕의 농가로, 가족 10명이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넓었다. 1층에는 아틀리에, 응접실, 식당, 부엌이 있었고, 벽에는 자신과 동료 화가들의 작품 복제본을 가득 전시했다.


그는 정원 부지를 사들여 직접 두 개의 정원을 조성했다. 다양한 꽃과 식물로 ‘꽃의 정원’(Clos Normand)이라는 내정을 만들었다. 루 강의 지류를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작은 녹색의 다리를 놓아 ‘물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이 연못에 70여 종의 수련을 재배했고, 이를 소재로 ‘수련’ 연작을 그렸다. 모네는 “내 최고의 작품은 정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원 가꾸기를 예술의 일부로 여겼다.


지베르니 모네의 집은 예술가들의 살롱이기도 했다. 그는 르누아르, 시냐크, 카예보트 등과 교류하며 예술적 토론과 우정을 나누는 공간으로 집을 활용했다.


Nymph%C3%A9as_(1907)_Claude_Monet_(W_1698).jpg?type=w773 Nymphéas(1907) - Claude Monet


모네는 지베르니 생활을 통해 일본 미술에 심취해 우키요에 판화와 도자기를 수집했고, 집 곳곳에 일본풍 장식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파리에서는 일본풍(Japonisme)이라고 불릴 만큼 일본 미술이 유행했다.


1854년 미·일 수호통상조약으로 일본은 서구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1860년대부터 일본의 도자기, 직물, 목판화(우키요에) 등이 대거 파리로 유입되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일본 예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며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풍의 화법은 서구의 화법과는 유별난 점이 있어 유럽 화단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일본의 우키요에(목판화)는 평면적 구성의 비대칭 구도로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는 점에서 유럽의 원근법 중심의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 체계의 미술이었다. 모네는 물론이고 드가, 르누아르, 반 고흐 등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은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모방하며 일본의 미학에 흥미를 가졌다. 이들은 한때 자신들의 회화 속 배경이나 소품으로 일본풍을 활용하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유럽의 일반인들도 급작스럽게 진전되고 있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우려하며 ‘자연과 조화된 삶’, ‘단순하고 정제된 미’를 표방한 일본 예술에 흥미를 가졌다. 일본의 도자기, 병풍, 부채, 직물 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는 것이 중산층으로 인정받는 요건이 되기도 했다.


모네는 우키요에를 수십 점 수집하고, 지베르니 정원에 일본식 다리, 수련, 대나무, 버드나무를 직접 배치했다. 그의 <수련> 연작은 일본 정원의 수면과 반사, 여백의 미를 서구의 회화 기법으로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훗날 “나도 일본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일본의 미학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Le_pont_japonais_(1918%E2%80%931924)_Claude_Monet_-_collection_Hideaki_Fukutake_(W_1.jpg?type=w773 Le pont japonais (1918–1924) - Claude Monet


인상주의의 기원이 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근대 회화의 새로운 문을 연 선언적 작품이다.


작품 속의 배와 사람, 항구의 구조물은 윤곽이 흐릿하고, 빛과 안갯속에 녹아들 듯 몽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보다 순간의 시각적 인상을 중시한, 당시로서는 모네 특유의 접근 방식이었다.


푸른 회색의 안갯속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이는 색의 대비와 반사 효과를 통해 시각적 떨림과 감각의 흔들림을 표현한 것이다. 물 위에 비친 태양의 반사도 정밀한 묘사보다는 감각적 인상에 집중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원근법이나 구체적 공간을 구성하기보다는 관람자의 시선이 안갯속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전통 회화의 구도 규칙을 해체한 시도였다.


그림 속의 항구는 모네의 고향인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르아브르(Le Havre) 항구다. 르아브르는 센 강(Seine) 하구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이어지는 항구 도시로,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다. 따라서 르아브르는 노르망디의 관문으로서 프랑스 북부의 산업과 여객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전략적 요충지의 하나였다.


르아브르를 중심으로 한 노르망디 지역은 짙은 해무, 빠른 날씨 변화, 부드러운 햇살로 대변되는 자연환경으로서, 이는 고정된 형태보다는 순간의 인상에 집중하는 인상주의 회화에 딱 맞는 배경이었다. 모네뿐만 아니라 부댕, 시슬레, 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노르망디에서의 야외 작업(플레네르)을 통해 변화하는 색과 빛을 표현하는 인상주의를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했다. ‘노르망디가 없었다면 인상주의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명제는 결코 과장된 허언일 수 없다.



Bateaux_devant_les_falaises_de_Pourville_(1882)_Claude_Monet_(W783).jpg?type=w773 Bateaux devant les falaises de Pourville (1882) - Claude Monet


빛의 항구로서 인상주의의 고향인 노르망디는 그로부터 70년 후 피의 항구로 새롭게 태어났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Landings)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이날 ‘D-Day’에 연합군은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을 개시하고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D-Day 자정 직후, 미국, 영국, 캐나다의 연합군 공수부대 24,000명은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주요 전략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C-47 수송기로 낙하산을 이용해 노르망디 내륙에 투입되었다.


작전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낙하 당시 칠흑 같은 어둠에 안개까지 끼어있어 낙하지점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으며, 독일군의 대공포로 인해 많은 병력이 흩어져야 했다. 일부 병력은 예정된 지점에서 수 km 떨어진 곳에 착지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낙하지점에서 소규모 그룹을 형성하여 목표를 향해 이동했으며, 지형지물과 민간인의 도움으로 당초 예정된 지역에 집결하는 데 성공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연합군 상륙함 약 5,000척 이상은 1944년 6월 5일 저녁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서 출발해 노르망디 해안 5개 상륙지점(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을 향해 이동했다. 모든 상황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독일군은 이들이 6월 6일 새벽에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함선들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의 일환으로 정해진 항로와 시간표에 따라 이동했다. 당시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았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군의 경계심을 낮추는 효과를 주었다.


연합군은 사전에 독일군에 대해 기망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연합군은 진즉부터 ‘포트튜드 작전’(Operation Fortitude)을 통해 독일군에게 노르망디보다 훨씬 북쪽의 파드칼레 지역이 상륙지점이라는 허위 정보를 흘렸다. 이들은 가짜 무기, 가짜 부대, 가짜 무선 통신을 활용해 독일군의 시선을 북쪽으로 빼앗아 놓은 상태였다.


더욱이 독일군은 6월 5일∼6일 사이 해상의 기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연합군의 상륙 작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일부 지휘관은 휴가를 떠났고, 총사령관 롬멜도 가족을 방문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해협의 레이더 감시망을 운영했지만, 연합군은 야간 이동과 전파 교란으로 이를 회피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공중 정찰도 제한적이었으며, 연합군은 우세한 공군을 바탕으로 상륙함 이동로에 대한 독일 정찰기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1944년 6월 6일 오전 6시 30분,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 5개 지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상륙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이미 투입된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고 교란 작전을 수행 중인 것에 더하여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독일군 방어선을 미리 공격하기는 했으나 상륙정(Landing Craft)을 이용한 병력과 장비의 해변으로의 상륙은 독일군의 치열한 반격에 부딪혔다.


오마하 해변에서는 미군 상륙 부대와 독일군 간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약 3,000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륙 부대원들은 해변에서 독일군이 설치한 지뢰, 철조망, 장애물에 차단되고 해안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독일군의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에 맞서야 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참혹한 전투의 날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변으로의 상륙에 성공하고 파리를 탈환하며, 서부지역에 또 다른 전선을 만들어 나치 독일을 동서에서 협공하는 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노르망디가 없었다면 인상주의의 빛도, 유럽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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