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드가가 1861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151 x 258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는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라고 말했다.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는 1834년 7월 19일 파리에서 출생하여 파리 대학 법학부와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활동하다 1917년 9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드가는 특히 사진처럼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시각적 감각이 독특하여 발레리나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기고 경마를 하는 기수의 동작을 그리기도 했다. 말년에는 눈병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조각에 몰두하였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드가가 발레리나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에투알>(L'Étoile, The Star)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무대 위의 프리마 발레리나를 중심으로, 조명과 관객의 시선을 섬세하게 포착한 인상주의 회화의 걸작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발레리나의 찬란한 순간뿐 아니라, 무대 뒤 인물의 존재와 관객의 시선을 통해 예술과 현실의 경계, 무대의 긴장감, 여성 예술가의 고독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Racehorses before the Stands>(1872)는 드가가 경마장을 배경으로 말과 기수들의 긴장된 대기 순간을 포착한 작품으로, 말과 기수들의 움직임과 빛의 흐름을 탐구한 인상주의 회화다.
작품 속 경마장의 풍경은 19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의 일상과 여가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드가는 경주 직전의 정적과 긴장감을 포착하고, 말과 기수의 순간적인 움직임과 자세에 집중하고 있다.
대각선 구도와 말의 그림자를 활용해 깊이감과 시선의 흐름을 유도하고, 강한 명암 대비와 자연광 표현을 통해 사진적인 현실감을 부각하되, 말과 기수의 실루엣에 포커스를 맞춰 얼굴과 표정의 상세 묘사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드가는 대부분의 경마 그림을 야외 스케치가 아닌 실내에서 그렸다 한다. 그는 제리코, 미소니에, 버넷 등 말을 전문적으로 그린 영국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말의 근육과 균형, 자세와 동세를 깊이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 여왕>에서도 말이 등장하고 있다.
드가의 작품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 여왕>(Sémiramis construisant Babylone)은 1861년에 제작된 대형 역사화로, 그가 인상주의 이전에 고전주의적 경향을 따르던 시기의 대표적인 습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미라미스 여왕은 실존 인물이기보다는 고대 아시리아 왕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에서는 그녀를 바빌론을 건설하고 제국으로 확장한 신화적인 인물로 재창조하여 기록하고 있다.
세미라미스 여왕은 고대 아시리아와 바빌론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로, 역사와 환상이 뒤섞인 매혹적인 여성의 대명사로 전해져 왔다. 그녀는 신화의 주인공으로 여왕이자 건축가, 정복자로서 특히 바빌론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미라미스의 전설은 실제 존재했던 아시리아 여왕 샴무라마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 왕 샴시-아다드 5세의 아내였으며,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는 섭정으로 아시리아를 통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에서는 세미라미스를 바빌론의 창건자, 위대한 정복자, 신비로운 여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까지 원정을 떠났으며, 바빌론에 공중정원, 성벽, 궁전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일부 전승에는 그녀가 비둘기에게서 키워졌고, 죽은 후에도 신격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미라미스는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정한 대표적인 여성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세미라미스는 단테의 <신곡>, 볼테르의 희곡,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등장하며, 여성의 권력과 욕망, 신화적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세미라미스를 지옥에 떨어진 인물로 묘사하며, 성적 방종과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여성의 정치적 야망을 위협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녀의 리더십을 교만과 오만의 상징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일부 전설에서는 세미라미스가 수많은 남성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세미라미스를 바벨탑의 교만과 연결하여 신의 질서를 거스른 인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종종 신의 심판을 부른 교만한 인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드가는 그의 작품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 여왕>에서 세미라미스 여왕을 바빌론이라는 거대한 문명의 이상향을 창조한 여걸로 묘사했다. 그녀는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건축과 문명의 핵심을 꿰뚫고 이를 현장에서 실행하는 전략가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드가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결코 부정하고 탐욕한 여인이 아니라 신화에나 존재하는 혁명적인 여신의 하나로 존재한 것이다. 특히, 바빌론이라는 불가사의 한 고대 문명이 섬세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는 여성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현세에 전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지금의 이라크 힐라 지역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위치했던 이 도시는 수천 년 전부터 정치, 종교, 학문, 예술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바빌론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왕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통일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6세기경 네부카드네자르 2세 통치 시기 바빌론은 중동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웅장한 성벽과 궁전, 에테멘앙키라라는 지구라트(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 공중공원 등은 이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하며 바빌론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 최초의 체계적 법전 중의 하나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원칙으로 유명하다.
1901년 이란의 수사(Susa) 지역에서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2.25m의 현무암 석주(Stele)에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 석주의 상단에는 함무라비 왕이 정의의 신 샤마쉬로부터 법을 받는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에 따른 동해보복형(피해자가 입은 해악과 동등한 정도의 형벌을 가함) 원칙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 왕이라도 법 아래 있으며, 법은 공공질서의 수단이라는 법치주의 인식을 확립하고, 법을 문자로 기록하여 만인에게 공개하는 성문법 전통을 확립한 것으로. 후대에 유대교의 율법, 로마법, 이슬람법 등 다양한 법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자들은 에테멘앙키라를 바벨탑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바벨탑은 성경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건축물로,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절 오만한 인간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 하다 이에 분노한 신의 개입으로 언어와 인류가 분산하는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신화적 서사를 담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에테멘앙키라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를 모시는 신전탑으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구조였으며, 종교적, 천문학적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를 바벨탑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과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고대 문헌에서도 바벨탑과 유사한 구조물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바벨탑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실제 건축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지역과 형태나 구조가 에테멘앙키라와 많은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 고증하고 있다.
공중정원은 높은 구조물 위의 계단식 옥상 정원으로 다양한 식물을 심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학자들은 식물들의 성장을 위해 유프라테스강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관개 시스템을 갖추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 아미티스가 고향 메디아의 산악 풍경을 그리워하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 공중정원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공중정원에 대한 실존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바빌론 당대의 것으로 발굴된 점토판 등의 기록에는 공중정원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공중정원으로 추정할 만한 유적지도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일부 문헌에서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은 유대인의 역사와 기독교의 성경에도 역사적 사건인 바빌론 유수로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유수란 기원전 586년경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유다 왕국을 침공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대 민족에게 국가의 멸망과 신앙의 위기를 가져온 중대사였으나, 현재까지도 민족의 정체성을 다지고 신앙의 깊이를 더하게 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되고 있다.
19세기말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가 바빌론을 발굴하고 이슈타르 문, 궁전, 사원 유적 등을 발견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라크의 주요 관광지이자 인류 문명의 상징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드가가 평생 독신을 고집한 것이 발레리나, 아니면 세미라미스 여왕의 전설과 모종의 연관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저 상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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