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 - 인상주의로 여성의 내면을 그리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640px-Berthe_Morisot_-_Le_Berceau.jpg?type=w773 Le Berceau - Berthe Morisot


모리조가 1872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56 x 46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는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화가로, 섬세한 감성과 대담한 붓 터치로 여성의 일상과 섬세한 감성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녀는 1841년 프랑스 부르주에서 출생하여 189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당시 여성은 살롱전에 자유롭게 참여하거나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웠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조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적극 참여하며, 남성 중심의 예술계에서 여성의 입지를 구축했다.


당시 여성은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그림을 그릴 경우에는 보호자(샤프롱)를 대동해야 만 가능했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모리조는 당시 살롱전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인상주의 전시회 8번 중 7번이나 참여하며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중심인물이 되었다.


인상주의 그림조차도 멸시를 받던 시기에 인상주의 화파의 여성 화가라는 존재는 모리조가 보통의 여느 여성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여성이었음이 분명하다.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미술 평론가 알베르 울프는 전시회에 참석한 화가와 작품을 혹평하며 “대여섯 명의 미치광이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은 여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 여자가 바로 모리조였다.


모리조는 에두아르 마네와의 각별한 관계로도 유명하다.


1868년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하던 중 당시 정물화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던 팡탱 라투르의 소개로 에두아르 마네를 처음 만났다.


마네는 모리조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이후 그녀는 마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며 파리 미술계의 요정 같은 존재로 부상했다. 마네는 그녀의 초상화를 10점 이상 그릴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예술적 존중에 더하여 이성적 감정도 교류했으나, 마네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사회적 평판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며, 모리조 역시 상류층 여성으로서 결혼과 사회적 평가에 대해 신중했다.


File-Berthe_Morisot,_The_Mother_and_Sister_of_the_Artist,_1869-1870,_NGA_466.jpg?type=w773 The Mother and Sister of the Artist - Berthe Morisot


모리조와 마네의 각별한 예술적 교류는 <화가와 엄마와 언니>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1870년 모리조는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화가의 엄마와 언니>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리조는 이 그림에 어머니와 언니 에드마를 등장시키고, 특히 임신 중이던 에드마의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모리조는 제출 마감일이 다가오자 마네에게 이 그림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지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마네는 찬찬한 조언 대신 모리조의 붓을 빼앗아 들고 직접 어머니의 드레스와 머리를 검은색으로 덧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배경까지도 손을 댈 채비로 거침없이 터치를 계속했다.


당황한 모리조는 마네의 손목을 붙잡고 간신히 그의 덧칠을 중단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그림은 크게 바뀐 상태였다.


이 작품은 당시 보수적인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후에 인상주의 화풍이 호응을 얻으면서 이 그림은 빛과 어둠, 자유와 속박,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인상주의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네와 모리조의 인간적인 교류는 마네가 모리조를 그린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라는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640px-Edouard_Manet_040.jpg?type=w773 Berthe Morisot au bouquet de violettes - Edouard Manet


마네가 1872년경에 그린 이 초상화는 모리조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우아함과 내면의 고요함을 진지하게 담고 있다. 모리조의 시선은 보는 이의 시선과 비껴가게 그려져, 그녀만이 느끼는 감정의 깊은 내면을 보다 심오하게 표현했다.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감정의 깊이를 강조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 속에 모리조가 제비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음에도 제목은 제비꽃을 든 모리조라고 붙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림 속에서 제비꽃은 모리조의 옷에 장식처럼 달려 있거나, 화면 밖에 있는 것으로 상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제비꽃이 여성의 우아함과 은밀한 감정을 상징하는 꽃이었고, 특히 검은 옷과 함께 제비꽃은 여성의 고요한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아니면, 그림의 제목을 마네가 직접 붙이기보다는 후대 미술사가나 소장가가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리조의 분위기와 상징성이 제비꽃의 의미와 연상되기에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마네는 모리조의 강렬하면서도 내면의 침묵을 담고 있는 여성적인 시선과 제비꽃의 의미를 융합해서 묘사했다. 그에게 있어 모리조는 제비꽃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제비꽃은 사랑과 비너스를 대변한다.


결국 이 그림은 마네와 모리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고 마네는 이에 큰 부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마네는 당시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부정적인 평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네는 피아노 교사였던 수잔과 오랜 동거 끝에 1863년에 결혼했다. 그들은 혼전에 아들 레옹을 낳아 오랫동안 그를 마네의 동생이라고 위장했다. 이에 더해 수잔이 마네 아버지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네는 ‘아버지의 여자를 뺏은 아들’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마네는 동료 화가들과도 자주 갈등을 빚고 있었다. 특히 드가와의 갈등은 주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처음 만났다. 드가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에칭으로 모사하고 있었고, 마네는 그의 대담함에 감탄하며 조언을 건네며 서로의 재능을 인정하고 교류했다.


그러나 드가는 마네의 부르주아적 성향과 출세 지향적인 태도를 비판했고, 마네는 드가의 지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에 불편해했다. 드가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감정의 표현을 중시했지만, 마네는 즉흥적이고 대담한 표현을 즐겼고, 사회적 명성과 평론가의 반응에 민감했다.


어느 날 드가는 마네 부부의 모습을 그려 초상화를 마네에게 선물했다. 그림에는 소파에 누운 마네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내 수잔이 등장했다.


마네는 그림을 보자마자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수잔의 얼굴과 피아노 부분을 칼로 잘라내 버렸다. 그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드가가 그린 아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드가가 자신과 수잔의 권태로운 일상의 분위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드가는 충격을 받았으며, 마네에게서 잘려나간 그림을 다시 받아 들고 돌아서야만 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하긴 했지만, 이후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dgar_Degas_-_Monsieur_et_Madame_Edouard_Manet.jpg?type=w773 Monsieur et Madame Edouard Manet - Edgar Degas


마네가 모리조를 모델로 또 다른 작품 <발코니>는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와는 달리 모리조를 잔잔하고 수동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당시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이는 작품성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마네와 모리조와의 관계를 시샘한 조롱거리로 활용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야의 <발코니의 마눌라스>을 오마주한 이 작품에서 모리조는 발코니 중앙에 앉아 멍한 시선으로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고립된 공간에 갇혀 타고난 매력과 재능을 억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마치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억압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 세상에 알려진 후 사람들은 그림 속의 여인이 마치 창녀 같다고 비난하는 바람에 모리조는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Edouard_Manet_-_The_Balcony_-_Google_Art_ProjectFXD.jpg?type=w773 The Balcony - Edouard Manet


마네는 모리조에게 자신의 동생 외젠 마네를 소개하며 결혼을 제안했다. 이는 모리조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비난을 피하려는 선택이었다.


1874년 인상주의 화가들이 첫 번째 전시회를 열던 해, 모리조는 외젠 마네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마네의 처제가 되었고, 마네와의 예술적 교류도 계속되었다.


모리조는 외젠 마네와의 사이에서 딸 줄리 마네를 낳았고, 줄리와의 평화로운 일상은 그녀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육아 가정생활을 원만히 하면서도 자신의 집을 인상파 화가들의 살롱처럼 개방하고 많은 화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모리조의 작품은 인상주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여성의 시선으로 일상과 감정을 포착에 집중한 점에서 독특하다. 그녀의 색채는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빛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녀가 그린 대상은 주로 여성, 아이, 가정, 정원, 실내 공간 등으로 사적인 일상의 순간을 차분하고 조용하게 묘사했다.


모리조의 작품 <요람>(Le Berceau)은 육아의 장면을 통해 여성의 모성의 세계를 깊이 있는 분위기로 은유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성과 아기는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와 그녀의 아기다. 에드마는 요람 속의 아기를 지그시 바라보며, 손으로 커튼을 살짝 걷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사랑과 걱정, 사색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모리조 특유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해 내는 특출한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기는 요람 속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고, 반투명한 커튼은 아기와 세상을 부드럽게 분리시켜 보호와 거리감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모리조가 언니 에드마를 자주 그린 이유는 깊은 자매애와 여성의 삶에 대한 공감, 그리고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 폰틸롱(Edma Pontillon)은 모리조와 함께 미술 교육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그들 자매는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등에게 사사하며 살롱전에 작품을 함께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9년 에드마가 결혼하면서 화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고, 이는 모리조에게 큰 슬픔이었다. 당시 다른 여성의 삶과 다름없이 에드마는 결혼 후 예술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사회적 기대에 따라 가정을 선택했던 것이다.


모리조는 언니를 통해 여성의 내면과 일상, 모성, 침묵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이를 시각화했다. 모리조는 여성 화가가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어려웠기 때문에도, 늘 실내에서 가깝게 함께 할 수 있는 언니를 대상으로 여성의 삶을 자유롭게 그려낼 수 있었다.


모리조에게 언니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당시 여성의 현실과 감정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모리조는 당시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활동하며,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을 그린 최초의 인상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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