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세잔이 1873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46 x 55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로, 입체주의와 현대미술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와 마티스가 “우리 모두는 세잔의 자식들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출생하고 1906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며 오직 예술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완벽을 추구했다. 어린 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는 후에 소설가로서 명성을 떨친 에밀 졸라였다.
세잔과 졸라는 엑상프로방스에서 함께 자란 고향 친구였다. 점차 졸라는 문학에, 세잔은 미술에 빠지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예술적 동지로 성장했다. 졸라는 세잔보다 먼저 파리로 진출하여 문학계에 입문했고, 세잔도 파리의 화단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도 우정을 이어가며 서로의 창작활동에 자극제가 되었다.
졸라는 미술 비평가로도 명성이 있었다. 그는 주로 신문에 기고한 자신의 미술 비평을 모은 <예술에 대한 글쓰기>라는 책을 통해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하고 당대 미술계의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여러 비평에서 당시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에두아르 마네와 폴 세잔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특히 마네의 예술적 가치를 최초로 인정했다.
또한 살롱(Salon)전을 ‘심사위원을 위한 축제’라고 비판하며, 보수적이고 관례적인 미술비평의 관행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작품을 대하면서 제일 먼저 확인하려는 것은 인간이지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미술은 시각적인 표현보다 인간적 체험과 감동을 중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졸라는 <내 친구 폴 세잔에게>라는 제목의 비평에서 두 사람의 예술적 교류와 우정을 과시하며 세잔의 작품을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졸라와 세잔의 관계에 결정적인 흠집을 가한 일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1886년 졸라는 <작품>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는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소설에서 클로드는 작품의 완성도에 집착한 편집증적 성향의 화가였는데, 결국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졸라가 클로드를 내세워 세잔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세잔도 이 소설을 읽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졸라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빙자해 자신을 무능하고 비극적인 예술가로 묘사했다고 단정했다. 그는 졸라가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고 믿었다.
세잔은 졸라에게 더 이상의 연락을 끊고 관계를 단절했다. 졸라도 더 이상 세잔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세잔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도 이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감각적 표현을 한 단계 발전시켜 회화의 구조와 본질을 탐구했다. 그는 인상주의가 추구한 빛과 색의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사물의 형태를 원, 원기둥, 구 등의 기하학적 요소로 분석했다. 원근법을 해체하고 명암 대신 색의 대비와 배열로 평면과 공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냈다. 이를 위해 같은 대상을 수십 번씩 그리며 형태와 색의 본질을 탐구했다. 이 같은 작업은 세잔을 정물화의 거장으로 평가받게 했다.
그의 <사과 바구니>(The Basket of Apples)는 정물화의 전통을 해체하고 현대 회화의 문을 연 혁신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세잔은 전통적인 회화의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을 깨뜨리고 정물에 대한 시점의 다중화를 시도했다. 즉 그림 속의 테이블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 놓고, 바구니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맞은편에 그려졌다.
또한 그림의 구도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병은 기울어져 있고, 테이블은 평평하지 않으며, 사과와 접시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그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불균형 속에서도 화면의 구도는 묘한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세잔은 회화란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정물화를 통해 대상의 구도를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또한 색의 변화를 통해 형태의 구도를 새롭게 구성하여, 마치 화면 속의 색채가 리듬과 균형을 만들게 했다. 그림 속의 사과가 각각 붉은색, 노란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형태에 함께 색채도 화면의 구도를 꿰맞추는 중요한 구성 요소임을 강조한 것이다.
식탁보를 구성하는 색과 질감도 다분히 의도된 기하학적 구도에서 표현되었다. 식탁보의 접힌 각도와 그림자까지도 마치 조각이나 건축물에서 하중과 형태를 조화롭고 균형 있게 구성하는 것과 다름없이 철저히 계산된 기하학적 셈법에 따라 구성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 작품을 보고 “우리는 이 위에 입체파를 세웠다”라고 말했다. 세잔은 정물화를 통해 회화의 공간 개념을 해체하고, 사유의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다. 20세기 이후 입체주의, 추상미술, 모더니즘은 바로 세잔의 정물화가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세잔의 작품 <모던 올랭피아>(Une moderne Olympia)는 1873년 세잔의 인상주의 초기 시절을 대표하고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것이긴 하나,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각이기보다는 미술 속에서 여성의 존재와 의미에 관해 다소 난해한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마네의 <올랭피아>에는 여성과 하녀가 등장하는 것에 반해, 세잔의 <모던 올랭피아>에는 그림 속 여성 옆에 남성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여성을 관람하는 남성의 시선이 마네처럼 그림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세잔이 그린 올랭피아를 관람하는 자는 그림의 외부에 존재하는 예술의 소비자가 아니고 올랭피아와 함께 그림 속에 존재하는 한 남성이 전부다. 이 남성은 화가 자신일 수 있다. 결국, 그림 속의 올랭피아는 관람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화실에 존재하는 화가 자신의 탐구의 대상으로 그려진 것임을 의미한다.
세잔은 여성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감정이나 욕망의 대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마치 사과와 같은 정물과도 같이 화가의 시각에 따라 관찰되고 탐구된 구조적 형태로 그려졌다. 여성의 몸에서 미적 동세를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된 회화적 구조로 이해하고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세잔이 실제 삶에서도 여성에 대해 복잡하고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세잔은 1869년경 마리 오르탕스 피케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1872년에는 아들 폴을 낳았으나 그로부터도 한참 후인 1886년에야 결혼했다. 그 사이 그는 마리의 존재를 가족에게도 철저히 숨기는 등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세잔은 마리에 대해 애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초상화를 위한 모델로 대한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그는 그림에서도 마리에 대한, 또는 마리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그녀의 무표정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그리는데 일관했다. 세잔은 그녀를 인물화의 모델이기보다는 정물화의 대상처럼 그린 것이다.
이쯤 되면 에밀 졸라가 <작품>에서 그린 비운의 화가가 세잔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완벽한 예술을 위해 아름다운 여성의 누드마저 테이블 위의 사과처럼 기하학적으로 재단한 광기에 찬 몰인정한 인간, 그래서 범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을 창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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